[다문화 사회의 초상] 동화와 배제의 정책 넘어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공존의 문화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며느리들이 다도를 배우고 있다.
한국사회는 외형적으로만 본다면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객관적 지표와 주변 상황은 우리가 이미 다문화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다문화'는 한국처럼 단일민족 혹은 단일문화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결혼과 노동, 이주 등 다양한 이유로 100만이 넘는 외국인들이 공존하고 있는 걸 보면 비교적 그 충격을 잘 소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러한 현상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며 우리의 일상에서는 다문화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법과 제도, 그리고 인식과 행동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사회가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계를 최소화하는 데 좀 더 치밀한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차용하고 있는 '다문화주의'의 출발은 1971년 캐나다의 수상 토르드가 캐나다의 통합을 위해 선언한 '다문화주의'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정책적 접근에서 시작한 다문화주의는 사회공동체 내부의 '공존'이라는 큰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다문화주의는 '공존'의 이름을 빌어 사회통합의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것으로 발전되어 왔다.

다문화주의에서 긍정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차이와 다양성의 인정과 공존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의 대상이 되는 소수 민족이나 인종을 기존 사회로 편입시키는 일이 얼마나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핵심이었던 것이다.

귀화시험에서 외국인 응시생들이 시험전 주의사항을 감독관으로부터 듣고 있다.
즉 우리가 접하고 있는 다문화주의 혹은 다문화를 둘러싼 다양한 정책과 담론, 행사 등은 어쩌면 다양성과 차이의 공존을 통한 다문화사회를 지향한다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것, 우리가 가진 것들을 지키려는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태도와 입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일까? 노동 이주를 통해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을 통한 이주와 정착을 택한 이들, 그들의 자녀 등 수많은 우리 내부의 다문화 환경에 대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까?

최근 외국인 노동자 '미누'의 강제 추방을 통해 나타난 사이버 공간의 여론은 우리 안의 한계와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의 추방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한국정부의 편협성에 대한 비판에 있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불법'을 문제삼으면서 '법치'를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최근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는 일종의 '법치 논리'가 먹혀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회적 편견도 자리잡고 있다. 특히 요즘처럼 취업난이 가중되고 있는 때에 노동 인력의 이주는 노동 시장의 잠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도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외부 환경과 의식 모든 면에서 많은 개방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더없이 '코스모폴리탄'이면서도 '국민'이라는 테두리에만 들어오면 국수주의자로 변모하고 만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내재하고 있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우리는 하나' 혹은 '우리가 곧 세계'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는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는 법 혹은 제도적 개선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구성원의 인식의 변화이다.

법과 제도의 개선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현실 인식이나 미래 비전, 다문화사회에 대한 접근 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할지라도 구체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인정한다면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음으로 인식의 변화 문제는 좀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다문화주의는 동화와 배제라는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취하고 있다. 전자는 외국인을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화 과정'을 통해 그들이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 되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후자는 한국사회로의 편입 자체를 막는 일종의 고립화 전략이다. 이러한 두 가지 전략의 결론은 명확하다. 한국사회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든지, 아니면 한국인이 누리는 다양한 혜택이나 복지 등은 언감생감 꿈도 꾸지 말고 너네들끼리 알아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결국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귀화 시험을 치르고 국적을 획득하는 것 이상이다.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니므로 한국인이 되라는 말이기도 하다. 국적과 인종 혹은 민족의 차이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이 드러내는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다.

누군가 한국이 너무 좋아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이름을 짓고, 한국사람과 결혼하고, 한국인으로 귀화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어떤 필요에 의해 시민권을 획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이 굳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면서까지 한국인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도 '한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이다.

서울의 청담동과 이태원에 이국적 취향의 카페가 늘어가고, 그런 곳에서 브런치를 즐긴다고 해서 다문화사회가 되는 건 아니다. 또한 정부나 지자체가 외국인을 위한 이벤트성 축제를 개최한다고 해서 다문화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문화에 대한 편견 없는 수용이며, 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먼저 인정하는 자세이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다문화사회의 초상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 국적, 언어, 문화가 서로 만나고, 소통하고, 충돌하고, 화해하는 일련의 '과정'을 함께 포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복잡한 과정을 생략한 채 무턱대고 어떤 결과로서의 '아름다운' 다문화사회를 그리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꿈이다.

가능하다면 업적이나 결과 중심의 전시행정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다문화사회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는 대부분 배제와 추방의 논리를 작동시켜 인위적으로 구성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명확하고 뚜렷한 모습의 다문화사회가 아니라 정형화되지 않은 과정으로서의 다문화사회가 더 나은 사회일지도 모른다.

권경우(문화평론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기획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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