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이 남은 12월, 공연계는 서서히 들뜨고 있다. 1년 동안 한 번도 '문화생활'을 하지 않던 사람들도 한 번쯤은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때가 바로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이다. 또 최근의 송년회 문화가 영화나 공연관람 등 '문화 회식'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는 점도 공연계가 12월에 더욱 기대를 하고 있는 이유다.

12월이 공연계의 최고의 성수기인 까닭은 양과 질 모두에서 '볼 만한' 공연들의 선택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문외한에게도 익숙한 유명 작품은 연말에 집중적으로 계획되어 있다. 올해 최고의 흥행작인 <오페라의 유령>과 이달 중 1000회를 맞는 <명성왕후>를 비롯해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는 <김종욱 찾기>와 <싱글즈> 등은 크리스마스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품격 있는 공연을 원하는 관객을 위해서는 세계적인 거장들의 클래식 공연들이 기다리고 있다. 1999년 첫 내한공연 후 해마다 콘서트를 여는 유키 구라모토, 장한나에 이어 한국을 찾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피아노 연주와 함께 하는 세계적인 베이스 연광철의 공연들은 비싼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공연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엔 <호두까기 인형>이다. 발레는 몰라도 <호두까기 인형>은 알 정도로 이 작품은 이미 연말 시즌의 최고 강자로 대중에 각인돼 있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고, 공급자인 발레단에서도 한해의 레퍼토리의 마지막은 으레 <호두까기 인형>으로 두는 것을 자연스레 여긴다.

주로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각축장이었던 '호두 전쟁'은 올해는 서울발레시어터의 창작 버전과 러시아 3대 발레단인 노보시비리스크 국립발레단의 프티파 원형 버전이 추가돼 총4개 버전으로 즐길 수 있게 됐다.

'노름마치'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담보된 시장은 파생 상품도 낳았다. 동명의 원작으로 모티프로 한 <시르크 넛>이 그것이다. 발레와 서커스를 결합한 '발레 아트서커스'라는 이름의 이 공연은 벨라루스 국립발레아카데미와 국립서커스단의 무용수와 곡예사가 어우러져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펼친다.

'호두까기' 특유의 발레적 특성과 <태양의 서커스>로 익숙해진 서커스의 재미를 결합한 만큼 연말 관객에겐 매력적인 선택이 될 만하다. <호두까기 인형>은 이밖에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이 만든 음악극으로도 선보여져 장르를 넘는 크리스마스 시즌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임을 입증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대형 공연장을 발레나 뮤지컬, 클래식 공연이 점령하는 동안 우리의 전통 공연들의 모습은 소박해 보인다. 때가 때인지라 평소의 정적인 이미지보다는 나름대로 흥겨운 분위기를 내보려 노력한 흔적들은 많이 보인다.

한편으론 이런 상황이 해마다 반복되는 것인 만큼,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만의 매력을 발휘하겠다는 고집이 엿보이는 작품도 있다. 적어도 참신성 면에서는 연말 베스트셀러들보다는 높은 점수를 줄 만한 공연들이 많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지갑을 열거나, 더 크고 재미있고 화려한 공연을 찾는 잠재관객들에게 이들 전통 공연들은 여전히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선택지다.

결국 크리스마스 시즌을 점령하고 있는 상위 랭커들의 현재는 그것을 대신할 만한 대안의 부재를 설명해준다. <호두까기 인형>을 비롯한 몇몇 연말 스테디셀러의 독점이 가능한 것은 시기와 맞물린 기호의 취합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경쟁 공연이 없다는 시장 환경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여전히 전통 공연에 많은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것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국악그룹 '슬기둥'
다른 작품에서 매력적인 요소를 차용해 자기화하는 시도는 현대극에서 이미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동양의 서양화, 고전의 현대화, 한국의 국제화, 탈장르화, 이 모든 것들은 기실 컨템포러리 아트를 설명하는 특성에 다름없다.

<춘향전>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크로스오버가 그렇고, 국악기 하나로 세계 모든 음악을 재해석해 소화하는 시도가 그것이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창작 버전 <호두까기 인형>은 각국 민속춤 장면에 장구와 소고를 연주하는 한국춤이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관객의 입맛에 맞게 진화를 거듭하려는 창작자의 노력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기 위한 전통 공연의 노력은 어느 정도까지 왔을까. 관객의 취향과 선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연말 공연시장은 그 노력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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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그룹 '프로젝트 락'
'로미오와 줄리엣'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