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아날로그 충돌과 상생]

2009년 문화계 주요 이슈 중 하나는 순수예술과 인문학의 인기였다. 클래식 음악과 미술 전시에서는 스타 예술가들이 이런 인기의 중심에 있었다. 춤과 연극도 대형 국제페스티벌을 통해 더 많은 관객과 만났다. 그동안 상류층이나 관계자들만의 문화였던 순수예술은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저변을 넓히고 있다.

'실용'을 중시하는 시대에서 위기를 외치던 인문학의 부상도 주목할 만하다. '쓸모 있는' 학문에만 관심이 몰렸던 사회는 다시 인문학을 필요로 하고 있고, 이에 따라 인문학자들도 다시 존재감을 과시하게 됐다.

최근 순수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에서는 비슷한 냄새가 난다. 바로 아날로그의 냄새다. 디지털 시대의 급속한 변화는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나아갈 방향을 놓친 개인은 불안해진다. 첨단 전자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그래서 디지털 경쟁이 전개될수록 인간 본질에의 관심과 이해가 중요해지는 건 당연한 귀착이다. 이는 결국 아날로그 문화가 다시 관심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디지털 혁명의 의미는 아날로그 시대에는 어렵거나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이 쉽고 해볼 만한 일이 됐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디지털 기기의 매뉴얼만 있다면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필름이 비싸 촬영 전 관련 기술을 습득하고 한 컷 한 컷에 심혈을 기울여 찍던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국민 취미'가 됐다.

동영상 기능이 강화된 기기를 가진 이들은 '나도 영화감독!'을 외칠 수 있는 세상이다. 이것은 인터넷 문학이나 기타 디지털 매체를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장르에서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그들만의 특권이었던 일이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것이 됐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게 되면서 고민의 무게도 가벼워졌다. 디지털 문화의 특징적인 경향은, 센세이셔널하지만 종종 센세이션 자체로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매체의 특성 때문에 일단 시의성 있는 화두를 던지며 이목을 끌고 출발하지만, 작품에 담긴 철학은 대개 거기까지다. 디지털의 '누구나이즘'은 문화예술에서의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공을 세웠지만, 오늘날 민주주의가 그렇듯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그것의 효용성을 묻는다. 디지털은 필요악인가. 그래서 우리는 결국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 쟁점에 혹자는 디지털은 여전히 희망이라고 하고, 디지털이 문화예술 본연의 매력을 망치고 있다고 답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쟁점에 대한 정답이 아니다. '누구나이즘'은 문화예술의 평준화에 있어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다만 창작-유통-수용 환경의 변화 이후 그에 부응하는 질적 변화가 하향된 것이 문제다. 그렇다고 이 지점에서 단순히 아날로그 문화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은 일종의 퇴행에 가깝다. 대안은 뭘까.

지난 몇 년간 등장한 '아나디지(anadigi)' 혹은 '디지로그(digilog)'는 이런 두 코드가 화해하고 상생할 수 있는 중간지점이다. 주류 문학에서 배제 또는 무시되던 인터넷 문학은 이제 기성작가들의 새로운 활로가 됐다.

현란한 테크놀로지에 잠식되던 미디어아트가 예술의 의미를 환기하며 기술의 적절한 활용을 다시 고민하는 최근의 흐름도 고무적이다. PC 오케스트라와 온라인 컬렉션 등 아날로그적 특성이 강한 매체에 디지털 코드를 가미한 사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이상적인 공존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나디지, 디지로그 문화의 출현은 사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예견된 것이다. 벌써 포스트 디지털 사회가 거론되고 있는 지금,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낡은 이항대립은 무의미해 보인다. 하나로 뭉쳐진 신개념 문화는 이제 '누구나' 대신 '어떻게'라고 물으며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즐거운 고민의 계기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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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