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아날로그 충돌과 상생] 아이폰, SNS, 웹 사이트로 누구나 최신 패션 정보 접해

모리츠 발데마이어의 LED 드레스
'서투른 기계가 만든 얼빠진 조형물'

이것은 19세기 중반 산업혁명 당시 기계가 찍어낸 형편 없는 물건들에 대해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붙인 호칭이다 (디자인의 디자인, 안그라픽스). 당시 사회 사상가인 존 러스킨과 예술 운동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제작과 강연, 예술 디자인 운동을 통해 기계 생산에 의한 폐해를 비판하고 장인의 기술을 옹호하는 반근대 성향의 주장을 펼친 이유는 한 마디로 기계가 생산해낸 물건들이 너무 안 예뻤기 때문이다.

수공예를 통해 오랫동안 갈고 닦여 내려온 형태가 기계에 의해 천박하게 해석되고 왜곡되어 빠른 속도로 대량 생산되자 미의식과 지성을 가진 이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그 어떤 변화도 근 3~4년간 패션계에 불어 닥친 것에 비교할 수는 없다.

아이폰으로 들어간 샤넬

우여곡절 끝에 얼마 전 드디어 한국에 상륙한 아이폰은 그 잡음이 무색하지 않을 만한 신세계를 보여줬다. 그 중에는 전자 제품에 일말의 욕심도 없는 이들조차 솔깃할 만한 것들도 있다. 아이폰의 수많은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 중 익숙한 샤넬 로고를 터치하면 패션쇼의 한 장면이 등장한다. 살포시 누르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다름아닌 2010 S/S 샤넬 컬렉션이다. 모델의 얼굴에서 시작해 구두까지 세세하게 훑어주는 카메라 앵글은 쇼 맨 앞자리가 부럽지 않다.

LED 드레스 제작 과정
아무리 그래도 컬렉션 당일 날 보는 것만 하겠냐고? 버버리 프로섬은 이번 시즌 컬렉션을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생중계했다. 전세계 버버리 마니아들은 같은 시간 영상을 보며 댓글로 의견을 교환했다. 뉴욕의 떠오르는 동양계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은 어떤가.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가방과 구두, 그리고 캐시미어로 만든 스카프 등을 판매한다. 가방 가격은 한화로 100만원 가량.

온라인 패션 시장이 활성화된 것은 수년 전 이야기지만 웹에서 럭셔리 아이템을 판매한다는 것은 아주 최근까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소위 '격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로, 패션을 상업이 아닌 예술로 인식하는 하이패션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은 채 패션 아이템을 사고 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이제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프로엔자 스쿨러는 온라인 홈페이지에서만 판매하는 상품을 따로 만들었고 구찌 역시 선글라스에 한해서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산업 혁명이 패션계에 가져온 변화가 제조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면 디지털 혁명은 주로 유통 방식에 관여한다. 전 세계를 거미줄처럼 묶는 이 무서운 기술은 '쉽고 빠른 공유'라는 기치 아래 패션의 성역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알렉산더 맥퀸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쇼 시작 5분 전의 설레는 심정을 수천 명의 폴로워(follower)들에게 남김으로써 간신히 인터뷰를 따낸 패션지 에디터를 맥 빠지게 만들었고, 패션계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프런트 로(front law: 패션쇼 맨 앞자리)는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와 24살의 패션 블로거 수지 버블에게 나란히 허용되었다.

아니, 아이폰만 있다면 굳이 이 북적거리는 쇼장까지 걸음 할 필요도 없다. 홈페이지, SNS, 아이폰… 사용 가능한 모든 기술과 기기들이 총동원돼 패션 평등주의를 앞당기고 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최신 패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물레를 자아 만든 옷감 카디
그러나 가속도가 붙은 이 거대한 흐름에 몸을 던지기 전에 망설임이 없을 수는 없다. 19세기 중반 기계 생산의 난폭한 확산이 그들의 섬세한 미의식에 상처를 냈다면 오늘날의 정보 기술 역시 새로운 시대에 어떤 상처를 내지 않을까?

디지털, 이번에는 무엇을 잘못했니?

"제일 기본적인 것들을 표현하지 못해요. 이를 테면 색깔이요."

디자이너 서상영은 지난 6월 국내 최초로 포털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 컬렉션을 선보였다. 당시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사용자들의 컴퓨터 환경에 따라 옷 색깔이 각각 달리 보여질 수 있다는 것. 특히 검은색은 모든 빛을 흡수해 버려 명암이나 양감이 전혀 표현되지 않았고 따라서 패브릭의 섬세한 결을 보여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일론이나 폴리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야 별 것 아니지만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도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문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분별한 노출로 패션이 응당 가져야 할 신비감을 무너뜨릴 위험도 있다. 아이폰에 서비스를 시작한 샤넬은 온라인으로 상품을 판매하느냐는 질문에 "전혀 해당 사항이 없으며 향후 계획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디지털 기술이 가져다 주는 끝도 없는 편리 중 샤넬이 취한 것은 프레젠테이션의 범용성뿐이었다. 그들은 판매의 편리는 고의로 무시함으로써 자칫 디지털 기술이 앗아갈 수 있는 럭셔리 브랜드의 희소성을 지키고자 했다.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여전히 누구나 살 수는 없다.

패션 브랜드의 아이폰 애플리케이션
쉽게 접하고 쉽게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디지털 환경은 더 나아가서는 옷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끼친다. 최근 한 시즌 입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이 유행하면서 자라, 유니클로 등 저렴하고 트렌디한 SPA 브랜드가 급부상하는 현실은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시사한다.

"패스트 패션에 열광하는 세대가 바로 디지털 세대입니다. 고르고 골라 오래 입는다는 인식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패션 저널리스트 홍석우 씨의 말처럼 사람들은 이제 색과 디자인만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면 쉽게 사서 입는다. 이렇게 구매한 옷들은 다음 해가 되면 또 쉽게 버려진다. 세월을 통해 검증되는 원단의 질 같은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참을 수 없는 디지털의 가벼움에 대해 몇몇 신중한 지성들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저 왕성하기만 한 생산과 소통이 과연 아름다운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비 파일로의 최근 전략은 그래서 너무나 참신한 나머지 생소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브랜드의 컨셉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소수 매체에만 화보를 전개하는 폐쇄적 마케팅을 진행함으로써 소통의 폭을 스스로 좁혔다. 디지털 식 대량 소통에 항거하는 아날로그 식의 맞춤 소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디지털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결국은 온라인 컬렉션을 진행한 디자이너 서상영의 말처럼 디지털의 장점이 "단점을 상쇄할 만큼" 크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웹의 위력은 홍보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혁신적으로 줄여주는 데다가 디지털 소통에 익숙한 다음 세대를 지속적으로 고객으로 유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고한 하이패션 브랜드까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라도 이 무차별적인 소통의 장으로 뛰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통의 생산 방식을 고수하며 아날로그의 가치를 이어가는 브랜드에서도 디지털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취하고 있다. 보그는 웹진의 부흥에 뚱해 있는 대신 스타일닷컴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업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더 공고히 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손바느질로만 수트를 완성하는 테일러블의 곽호빈 디자이너 역시 직접 와서 옷을 맞추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홈페이지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은 산업 혁명과 달리 품질이라는 패션의 핵심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날개를 달아줌으로써 자신의 영토를 키우고 있다. 향후 디지털의 미숙함이 개선됨에 따라 그 영역은 더욱 커질 예정이다. 사진이 점점 더 실물을 정확하게 반영하게 되면서 이미 일부 바이어들은 직접 방문하는 대신 사진으로 옷을 주문하게 되었고, 랄프로렌은 웹 사이트에서 브랜드의 시그니처 가방인 리키백을 평면이 아닌 360도로 회전하며 보여주는 방법을 개발했다.

나이키는 홈페이지에서 운동화의 색깔과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는 부분적인 오더 메이드를 실현했다. 이토록 살 냄새를 풍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디지털이라니. 앞으로 우리가 패션계에서 볼 수 있는 아날로그의 정체는 극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디지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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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