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각색을 촉구한다] 공연 창작자들 '구름', '황소아저씨', '다모' 등 무대화 후보로 손꼽아

영화 '구름'
타 장르의 무대화 작업이 빈번해지는 지금, 무대화의 중점은 이제 원작의 재미를 공연 환경에 맞게 어떻게 배가시킬 것인가로 바뀌었다. 따라서 무조건 베스트셀러를 무대화하려는 시도보다는 현실적으로 공연예술적 특성이 있는 작품이 무대화의 후보가 되고 있다.

공연 창작자들이 추천한 작품들은 고전에서 최근작까지 다양하다. 개인적인 취향이 십분 반영되어 있지만, 현실성과 무관하게 '누가 만들어도 좋을 것 같은 작품'이라는 콘셉트는 보다 풍부한 명작의 발견을 가능케 했다.

대학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고선웅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무대화 후보의 첫 손에 꼽았다. 고 연출가는 "100년 동안의 이야기가 담긴 이 작품을 연극으로 옮긴다면 3부작에 가까운 거대작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내며 "제작비 부담이 있긴 하지만 남미와 밀림이라는 미지의 땅을 한국화하는 작업이 흥미로울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서도 남미 작품을 꼽았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극장을 배경으로 공연장 철거에 맞서는 연극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페르난도 솔라나스 감독의 <구름(The Clouds)>이 그것이다. 고 연출가는 "무대언어와 행동언어를 영화의 영상미학 안에 담아내고 있는 작품인 만큼 무대화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김정숙 연출가는 동물을 의인화한 우화적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먼저 아동극 <강아지똥>의 원작자이기도 했던 권정생 선생의 <황소 아저씨>를 역시 아동극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원작 <황소 아저씨>는 엄마 잃은 새앙쥐가 먹을 것을 구하러 외양간에 왔다 황소 아저씨와 만나 이루어지는 이야기.

영화 '경계도시2'
김 연출가는 "무대를 외양간처럼 꾸미고, 황소 아저씨는 인형으로 만들어 새앙쥐가 된 배우들이 어우러지면 재미있지 않을까"하고 호기심을 나타낸다. 또 연망 박지원의 <호질>은 동물(호랑이)과 사람의 관계를 뮤지컬적 상상력을 동원해 각색한다면 현재의 우리 모습을 돌이켜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내용뿐만 아니라 춤 동작에서도 풍부한 가능성이 있어 중극장용으로 시도해봐도 좋을 듯하다."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형제는 용감했다>에 이어 올해 <금발이 너무해>까지 흥행시킨 장유정 연출가는 창작뮤지컬의 '황금손'답게 다양한 장르에서 가능성을 내다봤다. 그는 뮤지컬 마니아 사이에서 몇 년째 소문만 무성한 드라마 <다모>의 뮤지컬화를 다시 언급한다. "<다모>에는 액션과 사랑, 특히 삼각관계라는 내용과 설정이 흥미롭게 배치되어 있다. 또 안무적으로 볼 때도 뮤지컬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하다."

영화 중에서는 민규동 감독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꼽았다. 낭만성이라는 정서를 기반으로 뮤지컬에서도 로맨틱 코미디로 풀어낸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얽히고설킨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음악으로 표현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장 연출가는 문학에서는 여성의 시각으로 풀어낸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바리데기' 신화를 차용해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오늘날의 현실을 녹여낸 황석영 작가의 <바리데기>를 뮤지컬화 후보로 꼽았다. 그는 "중국과 유럽대륙을 건너 런던에 정착한 탈북소녀 '바리'의 시선을 통해 상처받은 인간과 영혼들을 용서하고 구원하는 원작의 대서사가 뮤지컬로도 대작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낸다.

또 그는 작자 미상의 <박씨전>도 각색에 따라 재미있는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한 마디로 못생긴 여자가 시집가서 박대받다가 결국 잘 살게 된다는 내용인데, 이번에 <금발이 너무해>를 하다보니 여성의 성공담이 의외로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 '유, 더 리빙'
뮤지컬 <빨래>를 연출한 명랑씨어터 수박의 추민주 대표는 독특하게도 다큐멘터리와 순정만화에서 후보를 뽑았다. 송두율 교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통일에 대한 당위성을 설파하는 다큐멘터리 <경계도시2>는 그가 근래에 본 최고의 영화다. 그가 생각하는 송두율 교수 역의 적임자는 연극배우 남명렬이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광복 후 여성국극을 조직해서 이끌었던 임춘앵의 이야기를 다룬 순정만화 <춘앵전>의 각색이다. 50년대의 걸그룹 춘추전국 시대가 뮤지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판소리와 춤을 모두 소화해내는 임춘앵을 비롯해 최승희, 이매방 등 한국 공연예술계의 거목들을 현대의 뮤지컬배우가 재현하는 재미와 의미가 동시에 충족될 수 있는 기회라고 할 만하다.

추 대표는 임춘앵 역에 이지람을 추천하며 "현대무용 작품의 무용수로도 출연하는 등 판소리를 하면서도 여러 장르에서 자신의 능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모습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래도 추 대표의 관심은 <빨래>에서도 드러났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가 추천한 또 하나의 무대화 후보는 고등학교 합창부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드라마 <글리(Glee)>다. 게이, 흑인, 동양인, 장애인, 임신한 여학생 등 학교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왕따'들만 모인 합창부가 자신들의 넘치는 재능을 춤과 노래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추 대표는 "한국 뮤지컬 배우들이 고등학교 합창부를 맡아 원작처럼 가요를 합창으로 편곡해서 부르면 훨씬 더 실감나고 감동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춤과 연극의 경계에서 새로운 접점을 찾고 있는 트러스트무용단의 김윤규 대표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도그빌>과 로이 앤더슨 감독의 영화 <유, 더 리빙>을 춤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이 영화들 자체가 마치 무대에서 일어난 것 같은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드라마 '다모'
두 작품은 인간 삶에 대한 거창한 철학이나 미화가 아닌 현실 그대로의 인간 존재를 말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 대표는 비슷한 맥락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도 춤으로 만들어봄 직하다고 말한다. "이제까지는 서구적 표현과 해석만 나왔지만 이제 우리 식으로 다시 읽을 때가 아닌가 싶다."

경계를 넘은 상상력과 창의성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새로운 관객과 만난다. 책에서,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에서 만난 매력적인 이야기들은 무대에 새로운 영감을 주며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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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영화 '도그빌'
소설 '바리데기'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