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각색을 촉구한다] 허영만 화백의 '벽'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 등 선택

영화 감독들은 영화하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8명의 감독들에게 각색하고 싶은 작품과 그 매력을 물었다.

민규동 감독의 <스나크 사냥>

<내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의 민규동 감독은 차기작으로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스나크 사냥>을 영화화한다. 한 여자가 총을 들고 자신을 이용하고 버린 옛 연인의 결혼식장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윤리와 법 사이의 괴리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딜레마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스나크 사냥>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의 서사시에서 모티프를 따온 제목이다. 잡는 순간 자신도 함께 사라지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괴물 사냥에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다. 니체의 언급처럼 사람들이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사이 그 심연도 그들을 들여다 본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무서운 범죄가 난무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으로 이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건에서 가장 무력하게 내팽개쳐지는 피해자 가족, 즉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다룰 것이다. 가해자를 합법적으로 만족스럽게 응징하기는 커녕 해소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심에 짓눌린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힘겨운 현실과 그로부터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최동훈 감독의 <벽>

<타짜>, <전우치>의 최동훈 감독은 허영만 화백의 <벽>을 골랐다. 대기업 집안 출신이지만, 가족사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린 한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많은 기업 스릴러가 있었지만 이보다 더 훌륭한, 재미있는, 흥분되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이해준 감독의 <낭만파 남편의 편지>

<천하장사 마돈나>, <김씨표류기>의 이해준 감독은 안정효의 소설 <낭만파 남편의 편지>를 품고 있다. 언젠가부터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사는 부부가 있다. 이런 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남편은 힘 닿는 한 낭만적이 되기 위해 신혼 때를 회상하며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아내가 그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자 남편은 아내를 시험한다는 내용이다.

"십여 년 전, 기묘한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낭만이 실종된 시대, 감상에 젖어 호기롭게 떨어본 낭만은 사치였을까. 우스꽝스럽게 시작된 이 욕망의 연쇄사슬은 종국에는 깊은 비애감마저 던져준다. 이 매혹적인 스토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화로 만든다면, 소설 이후의 전개를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확실히 남편과 아내의 욕망이 어떤 선을 넘게 되지 않을까. 코미디면서 슬프고, 단순하면서 복합적인 구조, 일상적이면서 스릴로서의 풍모도 갖춘 색다른 영화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다."

윤성호 감독의 <남궁선생전>

<은하해방전선>, <황금시대>의 윤성호 감독의 선택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소설 <남궁선생전>이다. 전라도에 살았던 한 부자가 자신 몰래 간통한 애첩을 죽였다가 형을 받는 등 산전수전 겪다가 산에 들어가 도술을 익힌다는 내용이다.

"<홍길동전>이 주인공이 도술을 배워 승승장구하는 이야기라면 <남궁선생전>은 도술을 배워도 안 풀리는 이야기다. 가족도 자꾸 발목을 잡고, 이래저래 면박을 당한다. 도술을 배워봐야 좋은 것도 없구나 싶다. 일종의 안티 히어로물이다. 홍상수 감독 영화에 나오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어울릴 것 같다. 장르는 블랙 코미디가 되지 않을까."

박신우 감독의 <절망의 구>

<백야행> 박신우 감독이 고른 작품은 '2009 멀티문학상' 수상작인 김이환의 소설 <절망의 구>다. 어느날 정체불명의 검고 거대한 구가 나타나 사람들을 빨아들인다는 설정을 통해 시대의 불안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세기말적 상황을 잘 그려냈고 이야기가 매우 장르적이다. 영화로 만든다면 일종의 좀비 영화가 되지 않을까. 도망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똑같은데, 좀비 대신 구가 나오는 거다."

박대민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

<그림자살인>을 연출한 박대민 감독은 유머러스한 문체로 한국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는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떠올렸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평소 창피하게 여겼던 아나키스트 아버지의 좌충우돌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리면서 점점 그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성장소설이다.

"신나게 재미 있게 읽은 소설이다. 특히 캐릭터가 흥미롭다.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 아니어서, 캐릭터의 힘으로 영화를 끌고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역시 힘 없는 사람이 한 방, 하는 느낌이 좋다."

박희곤 감독의 <겨울나그네>

<인사동 스캔들>의 박희곤 감독은 최인호 작가의 소설이자 곽지균 감독이 영화화했던 <겨울나그네>를 골랐다. 순수하게 사랑했지만 자신의 비극을 견디지 못하고 여자를 떠난 남자와, 그 슬픔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의지하게 된 여자 사이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청춘물의 고전이다.

"이미 영화화되었지만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쉽게 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현재에 맞춰 조금 다른 해석을 해보고 싶다. 예를 들면 친구이면서도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을 좀더 현실적으로 표현해보고 싶다."

황수아 감독의 <도가니>

<우리 집에 왜 왔니>를 연출한 황수아 감독은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를 선택했다. 청각장애인학교에 부임한 한 교사가 그곳에서 은밀하게 벌어져온 폭력과 비극을 세상에 알리는 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광주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가해자들에게 내려진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자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찼다'는 한 신문기사의 구절이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지옥 같은, 소통되지 않는 상태를 영상으로 옮겨보고 싶다. 소설의 배경인 안개 도시의 비주얼로 그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말로 할 수 없는 막막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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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