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광화문 광장의 '프랙탈 거북선'서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까지

서울빛축제의 일환으로 광화문 광장에 전시된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
#1 지난달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백남준의 <프랙탈 거북선>이 나타났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때 만들어진 후 대전시립미술관에 소장되었던 작품을 '서울빛축제'의 일환으로 옮겨 전시하게 된 것.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울문화재단 축제지원팀의 이정훈 대리는 "광장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미디어 작품을 통해 시민과 문화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2 서울 올림픽공원에 위치한 소마미술관에서는 로봇 형태의 설치 작품을 모은 <아이로봇 i Robot> 전이 열리고 있다. 박윤정 큐레이터는 "로봇 시대에 도래할 새로운 패러다임과 삶의 양식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여기에 백남준이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을 테마로 만든 <쿠베르탱>이 포함되었다. 이 작품은 "스포츠로 지구를 하나로 만들려 했던 쿠베르탱의 순수하고 평화로운 올림픽 정신과 예술로 전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 했던 백남준의 정신을 나타낸다"고 설명된다.

#3 지난 11월28일 저녁 6시 경기도 용인에서 흰 드레스를 입은 무용가 안은미가 피아노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피아노를 매단 끈을 자르자 피아노는 하릴없이 떨어져 박살 났다.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전 오프닝에서 펼쳐진 안은미의 퍼포먼스 '백남준 광시곡'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안은미가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대한 오마주로 마련한 퍼포먼스 <백남준 광시곡>이었다. 안은미는 "판타지를 좋아하고 춤의 살아 있는 에너지를 자신의 테크놀로지 아트로 무한 전송하려 했던 그의 예술은 굉장한 샤머니즘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춤과 통한다고 말했다.

한국사회 도처에 백남준이 있다. 그만큼 여러 맥락에서 해석된다. 가장 쉽게 접해지는 것은 작품의 첨단 기술적 이미지와 코스모폴리탄적 언어로서의 인터페이스다. 이는 백남준의 국제적 명성과 더불어 한국 현대미술이 지향해야 할 한 방향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언론은 종종 특정 작가를 '제 2의 백남준'이라 언급하면서 이를 부추긴다. 미디어 기술을 활용하고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제도에 인정받은 작가들이 대상이다. 대중적 미술 담론에서 백남준은 한국 작가들의 굳건한 롤모델이다.

하지만 일종의 대중문화로서의 백남준은 이를테면, 스타벅스 커피컵에 등장한 체 게바라 같다. 이야기되고 이야기될수록, 활용의 정도가 높아진다. 어떤 해석은 의도적으로 백남준을 축소하고, 어떤 해석은 오용한다. 어떤 해석은 심지어 백남준의 주장과 반대다. 이런 백남준'들' 속에서 한국사회는 어떻게 그를 잘 이해하고, 기리고, 넘어설 수 있을까.

백남준을 향한 열광, 서울 한복판에 등장하다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인 로버트 애드리언 엑스의 '모던 아트1'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한동안 도심 경관을 구성하고, 도시민의 삶의 환경으로 경험될 <프랙탈 거북선>은 한국사회가 백남준에게 보내는 열광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랙탈 거북선>은 원래 대전엑스포 재생조형관에 전시되었던 작품.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재생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의미로 고물 TV, 폐기된 자동차의 잔해, 버려진 피아노 등을 재료로 만든 것이다.

제목 역시 이런 맥락이다. '프랙탈'은 세부가 전체를 반복함으로써 언뜻 무질서해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나름의 질서를 구현하는 구조를 가리키는 물리학 용어다. 이 작품을 '거북'의 형상으로 만든 까닭도 "공룡시대부터 지금까지 기승스럽게 살고 있는 거북은 쾌속히 문명을 만들고 동시에 지구 자체를 파멸시키는 인류와 정반대로 인간 문화의 감속화와 장수화를 노리는 재순환 정신의 상징적 존재"(백남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에 놓인 <프랙탈 거북선>에서는 서울빛축제 측의 설명대로 "우리 문화 승리의 상징"으로서의 위용이 더 강조된다. 이순신 동상과 나란히 놓임으로써, 역사적 스펙터클을 앞세워 광화문 일대를 끊임없이 가동시키는 국가주의에 포괄된다. 또는 둘레에서 벌어지는, 조명을 이용한 다양한 행사들의 맥락에서 찬란한 시각적 자극으로서의 의미가 강조된다.

이런 '소통' 방식이 백남준 예술세계로의 진입로가 될 수 있을까. 김선정 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는 "이 작품이 굳이 이순신 동상과 함께 보여져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인 이승택의 '바람-민속놀이'
<프랙탈 거북선>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대전시립미술관 로비에서 광장으로 나왔건만 이 공간의 기호 체계와, 한국사회가 백남준에게 거는 통상적인 기대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서의 백남준

김선정 교수의 지적처럼 백남준은 "한국 현대미술의 한 전형적 아이콘"이 되었다. 이는 언론이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고도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 혹은 수사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현대미술의 성과나 가능성을 제시할 때 백남준은 편리하게 동원된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언론이 한국현대미술의 어떤 경향이나 작가를 설명할 때 등장시키는 '백남준'이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나 고찰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형성되고 있는 미디어아트 담론 속에서 선구자로서의 '백남준'의 의미는 '제 2의 백남준', '백남준의 후예' 등으로 활발히 파생되고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인 로버트 애드리언 엑스, 안은미, 씨엘 플로이에, 이승택
2008년 뉴욕현대미술관이 정연두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면서 언론이 일제히 그를 '제 2의 백남준'으로 '공인'하다시피 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전까지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된 한국 작가가 백남준뿐이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정작 두 작가 간 연속성은 크지 않다. 하나의 이름으로 이어지기에는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 미술계 내부의 평가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인지도를 내세워 자리매기기 위한 이름 붙이기"라고 지적했다.

백남준의 유산을 계승하는 방법

물론 백남준은 길이길이 기려질 만큼 훌륭한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백남준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가시적인 열광은 오히려 백남준의 진의와 진가를 가려버릴 수 있다.

지난해 2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는 이런 고민에서 마련된 자리였다. 이 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은 김진석 인하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는 "이제까지 한국에서는 그를 과장적이며 일방적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강했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란 칭호도 적지 않은 경우 너무 단순하게, 너무 국가주의적으로 남용되곤 했다. 그를 지나치게 '세계를 빛낸 한국 예술가'로 칭송하는 국가주의적 경향은 부끄러울 뿐 아니라 잘못되었다. 그 스스로 벗어나려 했던 국가주의 및 애국주의에 그를 다시 묶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오랫동안 떠났던 한국사회에서의 오랜 열광까지 덤으로 안겨준 백남준의 국제적 명성과, 그의 작품의 특징인 첨단 기술적, 초국적 이미지의 연원은 실은 떠돌아다니며 살 수밖에 없었던 백남준의 삶과, 그로 인해 체득했던 삶의 방식 철학과 긴밀하다.

예를 들면, 그가 한국을 떠난 것은 전쟁에서의 피난이었고 비디오라는 미디어는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미끄러지다가 발견한"(함성호) 그만의 언어였다. 마르크시즘에 대한 경도와 그것이 좌절된 경험, 또 아버지의 친일을 괴로워하면서도 부잣집에서 태어난 혜택을 받은 데서 기인한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 등이 우러난 결과가 백남준의 예술 세계인 것이다.

백남준이 한국사회에 남긴 유산은 이런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아닐까. 백남준을 통해 우리는 특정한 역사 사회적 상황을 한 개인이 가장 치열하고도 보편적으로 관통한 과정으로서의 예술과, 그것이 제기하는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삶의 본질적 질문들"(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을 접할 수 있다.

백남준을 넘어서

백남준의 유산을 잘 계승하는 방법은 그를 한국현대미술의 유일한 전범이 아닌, 중요한 참조점이자 거울로 해석해내는 것이다.

김선정 교수는 '콜라보레이터(협업자, 공동 작업자)'로서의 백남준의 면모를 주목해야 할 점으로 꼽았다. 알려져 있다시피 백남준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플럭서스 그룹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과학자, 기술자들과도 자유롭게 협업했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독자성이 강조된 모더니즘 미술과 다른 현대미술적 특성"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한국현대미술에서 내세울 만한 사람이 아직도 백남준뿐이라는 데에 안타까움을 느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백남준에 대한 열광은 한국현대미술이 그만큼 답보 상태임을 증명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미술계의 척박한 토양을 상기시킨다.

"서구뿐 아니라 최근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아시아에서도 한국만큼 시장주의적이고 획일화되어, 미학적 실험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곳이 없다. 백남준 역시 한국이 키운 작가는 아니지 않나. 백남준을 기리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안된다. 백남준을 넘어서는 작가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2008년 문을 연 백남준아트센터가 개관 1주년을 맞아 만든 '국제예술상'은 백남준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제1회 수상자의 면면은 백남준의 예술세계가 어떻게 응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힌트를 준다. 무용가 안은미, 미디어 아티스트 로버트 애드리안 액스와 씨엘 플로이에, 설치미술가 이승택이 선정되었다. 각기 다른 장르와 국적, 철학과 정서를 지닌 작가들이다. 이들과 백남준의 관계는 바로 실험과 도전 정신이다. 작품의 기술이나 표현 양식이 아닌 정신과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설치미술가 이승택의 예술 세계가 상징적이다.

"1964년 <강에 떠내려가는 불붙는 화판>이란 작품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쓰레기 같은 그림들을 불살라 강물에 떠내려 없애려는 것이었다. 당시 한강은 국가 안보에 아주 중요한 군사기지여서 한강에서의 불장난은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나는 12월25일 크리스마스를 맞아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007작전으로 이를 서둘러 결행했다. 불지르고 사진 찍고 허겁지겁 달아나다시피 아슬아슬한 모험을 감행해 성공했다. 이 실험 행위가 후일 실험 예술로 인정되어 평론가 김복영이 나를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저서에 기록했다."

백남준을 이해하는 몇 가지 단초들

백남준아트센터는 2009년 2월과 9월 두 차례의 국제 세미나 <백남준의 선물1, 2>를 개최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적절한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내용 중 백남준을 이해할 만한 몇 가지 단초를 추려 보았다.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다. 바로 전쟁이다. 나는 2차 대전을 겪은 세대다. 백남준은 초기 녹음 작업에서 전쟁 중 사람들이 죽을 때 내는 비명 소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 둘 모두에게 친숙한 비명소리다. 우리는 각각 동양과 서양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의 고통을 알고 있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절대로 그것을 다시 겪으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에는 정치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했다가 나중에는 매우 정치적이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플럭서스 그룹 작가)

"백남준의 청년기인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지식인인 체 하려면 기본적으로 마르크시즘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백남준 역시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수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70년대 한 인터뷰에서 마르크시즘과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이렇게 밝힌다. "어느 때 나는 내가 잘못된 편에 속해 있는 듯이 느꼈다. 1950년대 우리는 피난 열차를 타고 있었고 도피했다. 나는 내 자신이 어느 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생각했다. '그래, 대오각성이다. 이제 모든 것을 야구경기 보듯 하자. 심각하게 생각할 건 아무것도 없지.' 난 꽤 냉소적이었다." -김수기(시각문화연구자)

"백남준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루카치나 카프카도 작품을 헝가리어나 체코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썼다. 조이스나 존 레논, 쇼, 와일드, 혹은 베케트가 켈트어로 작품을 썼다면 세계 문화계는 꽤나 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위의 천재들은 자신들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엽적인 자신들의 언어보다 독일어나 영어로 쓰려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모두 각자의 결점을 지닌 사람들인 것이다."

백남준의 자기 인식이 돋보이는 대목은 '모두 각자의 결점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이 결점이 바로 언어와 언어 사이에 놓인 자의 갈등이기 때문이다. 조이스는 자신의 작품을 세계인들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일랜드어와 영어 사이에서, 카프카는 체코어와 독일어 사이에서, 영어도 아니고 아일랜드어도 아닌, 독일어도 아니고 체코어도 아닌 독특한 글쓰기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결국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그가 발견했던 세계도 이러한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찾아진 것이다." -함성호(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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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