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 예술과 벽의 경계를 허물다] 캔버스 둘러싼 테두리, 첨단기술 만나 작품의 일부로 다양한 활용

이현진 작가의 'Ripplecast(물수제비던지기)' 2009
회화에서 액자는 작품의 완결성을 의미한다. 3차원을 담아낸 2차원의 평면은 네 가장자리에 틀을 끼워 넣는 과정을 거치고서야 변변한 미술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종종 화려한 금빛의 사각 프레임이 작품을 압도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들로 북적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선의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한 '스푸마토 기법'의 작품은 오히려 지나치게 장식적인 액자로 인해 감상에 방해를 받는다. 청바지를 돋보이기 위해 모델들의 윗옷을 벗긴 광고가 오히려 모델의 벗은 몸으로 시선을 끌어 잡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예술과 벽의 경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액자는 작품과 관람객의 거리까지도 컨트롤한다. 곧 감상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주체와 객체를 작품과 관람객으로 이분화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열린 감상을 방해하는 액자에 대해, 몬드리안은 그림 네 점을 액자 없이 전시회에 출품하는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1920년인 당시 미술계는 액자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애호가와 비평가들의 성화에 몬드리안은 뒷면에만 액자를 사용하기도 했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액자는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하고 이동의 편의성을 위한 기능적인 역할에 충실해왔다. 이런 액자가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다. 'Involved frames', 다기능 액자로 풀이되는 이것은 액자가 예술가의 창조적인 경험을 돕는 적극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어디가 작품이고 어디가 액자인지 구분이 모호하고 인터랙션을 통해 해석의 여지도 열려 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캔버스를 둘러싼 테두리인 액자가 작품의 일부로서 기능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예술작품이 액자에서 나아가 액자가 걸려야 마땅한 갤러리를 벗어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오동훈 작가의 '디지털 행차도' 2009
프레임을 뚫고 나온 예술

친구 집에 몰려와 닌텐도 위(Wii)를 하는 것인지, 갤러리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미래파의 주창자 마리네티가 일찍이 자동차와 비행기가 진정한 현대의 미학이라고 말한 것처럼 21세기의 미학은 아이폰과 닌텐도 위(Wii)인 것일까. 이미 이들을 갤러리로 끌어들이는 시도가 해외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세밑 한빛미디어갤러리에서 시작된 전시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현진 작가의 '물수제비던지기 2009'는 잔잔한 호수의 이미지가 벽에 프로젝션되어 있다. 위리모트(Wiiremote)를 손에 쥐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돌을 던지는 자세를 취하면 가상의 돌은 호수 위에서 물 수제비를 만들어낸다. 각도와 강도를 달리할 때마다 결과는 달리 나온다. 분리된 한 방향의 감상이 아니라 관람객이 행위를 해야만 완성되는, 감상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조대왕의 화성행차도를 8폭의 디지털 병풍에 담은 '디지털 행차도'(오동훈) 역시 관람객이 다가가면 병풍 속의 행렬이 살아 움직이는 방식을 취한다. 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전체 행렬이 움직이다가 한 폭씩 감상하는 동안엔 하나의 화면에서만 다양한 움직임과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그런가 하면 비슷한 디지털 병풍의 형식을 갖추고 있더라도 <서울 디자인 자산 展>에서의 민화는 관람객과의 상호작용보다는 액자의 확장에 초점을 맞춘다. 세 폭의 화면엔 각각 호랑이와 고양이가 하품을 하거나 나무 위를 오른다. 이들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것은 첫 번째 화폭에서 푸드득거리며 날아간 한 마리 까치다. 이 디지털 민화는 세 개의 화면 사이에 검정색의 여백을 두고 있지만 이에 아랑곳 않는 새는 반가운 손님의 등장을 알릴 뿐이다.

'서울 빛 축제'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세종문화회관 건물로 비추고 있는 빛
미디어 아트는 기본적으로 액자에서 자유로워졌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일색에 대한 반동으로 혹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작품의 네 모서리를 고정하는 액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일렉트로닉 캔버스를 사용하면서도 기존의 액자의 틀을 사용해 LCD모니터와 차별화한다. 이는 액자가 상징하는 오리지널리티의 아우라를 획득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인 것이다.

거리로 나온 예술, 프레임의 행방은?

지난 8일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작된 <서울 디자인 자산 展>에서 또 하나 흥미를 끌 만한 것은 거대한 벽면이었다. 이 벽의 중간엔 소형카메라가 부착된 터치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소형카메라 앞에서 찍은 사진은 곧바로 스크린에 보여지고 이것을 손가락으로 움직이거나 색연필 기능을 사용해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쓸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손가락을 드래그해서 옆의 벽면으로 던지면 그대로 보거나 이메일이나 핸드폰으로 전송하거나 즉석에서 프린트할 수도 있다. 단지 테크놀로지만을 구현한 것이지만 벽면을 이용한 미디어 파사드 기법은 터치 스크린을 만나 그럴싸한 인터랙티비티를 재현하고 있다.

상업적인 면에서 미디어 파사드가 적용된 사례는 오래 전부터 볼 수 있었다. SK텔레콤의 T타워 같은 경우도 건물의 일부에 LED 스크린을 차용해 외벽 혹은 내벽에 띠 형태로 설치했다. 때로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아트채널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지나갈 때 인터랙티브 스크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첨단의 기술과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작가적 상상력과 스토리가 가미되는 순간, '가장 미래적인' 형태의 미디어 아트의 정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미디어 파사드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내 '서울디자인자산전'의 전시 마지막 방에 설치된 미디어 파사드 기법을 이용한 설치물
그러나 국내의 예술로서의 미디어 파사드는 이제 시작 단계다. 대우 빌딩 위, 줄리안 오피의 '걸어가는 사람'이나 서울빛축제의 일환으로 세종문화회관이나 KT건물 위에서 펼쳐지는 미디어 퍼포먼스는 미디어 파사드 기법이 적용된 사례다.

특히 100m의 세종문화회관 전면을 와이드한 스크린으로 활용한 미디어 퍼포먼스는 6개의 화면으로 분할해 다양한 스토리를 전달하고 있다. 서울빛축제의 예술감독인 김형수 교수(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는 "미디어 파사드의 다양한 미디어 퍼포먼스는 아날로그적 물성인 물리적 공간의 건물 전면을 디지털 액자로 활용하는 것"이라면서 "사진, 영화, 비디오, 오디오, 컴퓨터와 디지털 아트,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통섭적으로 운용하는 미디어 아트의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활용하는 미디어 퍼포먼스는 그 자체가 미디어의 운용"이라고 설명했다.

2008년 말, 청계천 벽면에 투사했던 로랑 프랑소와의 '디지털 가든'과 미구엘 슈발리에의 '프랙탈 플라워'는 여기에 인터랙티브까지 가미된 형태다. 지나는 시민들의 행동에 따라 꽃이 인사를 하거나 개화하기도 한다. 완성된 예술이 아닌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과정으로서의 예술'이자 예술의 공공성을 띤 미디어 아트의 표본인 셈이다.

과거의 액자는 작품을 가두는 틀이자 한계였고 그것 역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액자를 파괴하고 거리로 나온, 즉 미디어 파사드를 통한 예술 표현 방식은 관람객에게 창작의 체험과 더 많은 예술의 소통 가능성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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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건물 위의 미디어 퍼포먼스
SK텔레콤 T타워 내부에 설치된 '사람들의 초상'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