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침 도는 TV] 오감 자극하며 드라마, 영화, 리얼리티 정복한 음식

영화 '식객2'의 한 장면
11시가 넘은 이슥한 밤,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 '알리오올리오'란 단어가 떴다. 곧이어 연관 검색어로 '알리오올리오 만드는 법', '알리오올리오 맛집', '파스타에 나오는 파스타'가 줄줄이 이어졌다.

알리오는 마늘, 올리오는 올리브 오일이다. 마늘과 올리브 오일로 맛을 낸 파스타 알리오올리오는 드라마 <파스타> 3회에 등장했다. 윤기 나는 노랑색 파스타 면을 포크로 돌돌 감아 입에 넣는 출연자의 입술이 오일로 번들거리자 집에서 TV를 보던 사람들은 거의 테러에 가까운 자극을 참지 못하고 온라인 세계에 접속해 '고통'을 호소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이제는 TV도 조심해서 봐야 한다. 드라마, 오락 프로 가리지 않고 굽고 튀기고 졸이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케이블 TV는 더 심하다.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요리사 지망생들이 음식 대결을 펼치는가 하면 세계적인 셰프들이 직접 나와 칼질을 한다. 1월 말에는 김치 대결을 주제로 한 영화 <식객 2>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금, 왜 음식인가.

주방의 문이 열리다

'식객2'의 방울토마토 김치
음식은 늘 좋은 주제였다. 화려한 색깔에 지글지글 볶는 소리에는 누구나 파블로프의 개처럼 속절없이 침샘을 자극당하게 마련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이 공감각적 소재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관객의 시선을 끄는 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드라마 <파스타>와 영화 <식객 2>의 도입부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거의 5분 이상을 신나게 썰고 끓이는 장면을 클로즈업 하는 데 할애했다.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거다. 그저 보고, 듣고, 침 흘리면 된다. 그러나 최근 TV와 스크린이 주목하는 것은 음식뿐이 아니다. 앵글은 프라이팬에 담긴 음식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 팬을 쥔 손, 그릴의 열기로 땀이 범벅된 얼굴, 그들이 발을 딛고 선 주방, 그리고 주방의 주인인 셰프에게로 옮겨갔다.

세계적인 천재 셰프들 중에는 공교롭게도 정신감정을 고려해야 할 만큼 괴팍한 이들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이가 영국 요리사인 고든 램지. 그는 요리사들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는 건 물론이고 누구의 얼굴을 때려 이를 부러뜨렸다더라, 류의 소문은 그의 요리만큼 유명하다.

이 캐릭터를 십분 살린 리얼리티 프로그램 <헬스 키친>과 <키친 나이트메어>에서 그는 요리사 지망생들이 만든 음식을 쓰레기통에 처박고는 "나보고 이런 쓰레기를 먹으라고?"라고 내뱉는가 하면, 게으른 식당 주인에게는 "당신의 레스토랑은 곧 망할 거요"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시청률을 보장하는 이런 흥미로운 캐릭터를 국내 방송이 놓칠 리 없다.

'7성급 셰프' 에드워드 권은 함께 일할 요리사를 뽑는 <예스, 셰프>에서 지원자들이 낭비한 식재료를 쓰레기통에서 다시 꺼내 돌아가며 먹게 하고, 드라마 <파스타>의 괴짜 셰프 최현욱(이선균 분)은 "내장을 확 뽑아 소시지로 줄줄이 매달고 싶은 것들아"라는 유럽풍 욕으로 스스로 램지의 현신임을 드러낸다.

드라마 <파스타>의 꽃미남 요리사들
셰프를 통해 주방의 정치적 구도도 자연스레 드러나는데 이 역시 볼거리다. <파스타>는 6회분을 방영하는 동안 셰프와 오너 간의 갈등, 홀과 주방 사이의 알력, 요리사들이 받는 뇌물의 유혹 등 실제로 주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과장되게나마 제법 골고루 조명했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사랑 무대를 법원이나 캠퍼스에서 주방으로 바꾼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베일에 꽁꽁 싸인 주방이 시청자들을 향해 열리면서 여태껏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을 보여준다. 군대의 수장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셰프와 3년을 썩어야 간신히 프라이팬을 잡을 수 있는 치열한 세계에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다.

캐릭터만을 살펴 보면 사실 썩 잘 만든 드라마라고는 할 수 없는 <파스타>는 – 사과하려는지 유혹하려는지 불분명한 이하늬와 걸핏하면 울상을 지으면서도 도대체가 변명할 생각이 없는 공효진 등 – 대신 주방이라는 신세계와 자주 상의를 탈의하는 꽃미남 요리사, 그리고 블록버스터급 영상미(첫 회에서 튀김기 속으로 얼음이 들어가 폭발하는 장면) 등을 내세워 제법 볼거리를 생성해냈다.

"이전의 요리 관련 프로그램들이 음식과 레시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셰프의 캐릭터나 긴장감 넘치는 대결 구도, 망해가는 레스토랑 살리기 같은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녹아 들어가 있는 게 특징이에요. 이런 요소들은 요리 프로의 주 시청자를 40~50대 여성에서 30대 남자들로까지 확장시키고 있어요."

QTV 조성경 팀장의 말처럼 무엇과 섞느냐에 따라 요리 프로그램의 시청자도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다. 미국의 쿠킹 버라이어티 <철인 요리왕>은 요리사들 간의 대결 구도도 모자라 아예 배경을 사각의 링으로 설정했다. 4명의 스타 셰프에게 숨은 요리 명인들이 도전장을 던진다는 내용인데 요리에 격투기 콘셉트를 가미한 이 프로그램의 주 시청자는 여자가 아닌 남자들, 그것도 30대의 젊은 남자들이다.

고든 램지의 '헬스 키친'
음식과 격투기가 만나다?

또 하나, 음식이 주인공으로 떠오른 배경에는 '한식 세계화'라는, 지금 대한민국을 애타게 만들고 있는 주제가 있다. 지난해부터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진행되어 온 한식의 세계화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얼마 전 뉴욕에서 한식 알리기를 시도하며 대중에게 각인됐다.

곧 개봉하는 영화 <식객 2> 역시 김치를 대결 주제로 잡고 전통 요리사와 퓨전 요리사를 경쟁시키며 한식 세계화를 공론화했다. 엄마 밥이 먹고 싶어서 자살을 포기한 범죄자와 어릴 적 트라우마를 음식으로 해소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이미 몇 번이고 재탕된 것들이지만 천재 요리사들이 만드는 창의적인 김치들은 확실히 침샘을 자극하는 훌륭한 장치들이다.

연어와 김치를 말아 꽃처럼 만든 연어 김치와 게살에 버무려 게껍질에 담은 대게 김치 등은 요리 연구가 김수진 원장이 200여종에 이르는 한국의 김치를 모조리 조사하고 분석한 결과다. 막바지에 등장하는 "우리도 잘 모르는 김치를 어떻게 세계에 내겠느냐"라는 대사에서는 한식 세계화를 둘러싼 제법 깊이 있는 고민이 드러난다.

지금 TV와 영화 속에서 화려하게 변주되는 음식 뒤에는 위상 변화라는 배경이 있다. 즉 음식이 모양새나 인식 면에서 좀 더 그럴듯해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맛만 좋으면 투박한 모양도, 욕쟁이 할머니 식의 서비스도 용서가 됐다. 그러나 최근 1~ 2년 사이 좋은 곳에서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으며 예쁜 음식을 맛있게 먹기, 즉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의 개념이 급격하게 퍼졌다.

'식객2'의 대게 김치
더불어 요리사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은퇴하고 뛰어드는 직종에서 고학력 전문직종으로, 기능직에서 창의성과 카리스마가 필요한 직업으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직업이 요리사라거나 레스토랑 소개 글에서 '000 셰프가 오픈한' 같은 문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파인 다이닝에 대한 호기심과 현실이 만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 지점은 텅텅 빈 홀이 민망하고 청담동 레스토랑의 상당수가 수지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술값에는 제한을 두지 않으나 음식값에는 제한을 두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특히나 한식 앞에서는 가격 상한선이 훨씬 내려가버리고 마니,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음식을 누구에게 비싸게 팔 수 있을까.

도움말: 이유진 푸드칼럼니스트, 조성경 QTV 편성팀장, 미상유 푸드칼럼니스트, 온 스타일 마케팅 한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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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