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용 문화공간의 요구] 떠돌이 생활 서울아트시네마, 시네마테크 전용관 설립 추진위 발족

시네마테크 서울 건립 추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사진 제공=)
15일 서울 종로구 시네마테크 전용관 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과 배우들이 모였다. 올해로 5주년을 맞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 여기에선 또 하나의 행사가 있었다. '서울에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설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의 발족식이 그것이다.

천만 관객 시대면 뭘 하나, 시네마테크 전용관도 없는데

"시네마테크? 고전영화 트는 데 아니야?"

아직도 시네마테크 문화는 씨네 필을 제외한 일반 관객에겐 낯선 문화다. 해가 지고 어둠이 어스름하게 내리면 하나둘 낡은 극장으로 몰려드는 씨네 필들을 가리켜 유령이라고 묘사한 글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마약 같은 중독성이 바로 영화예술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시네마테크의 매력이다. 시네마테크는 국내외 명화들을 보유하고 이를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영화도서관이자 영화박물관이다. 뉴욕이나 파리, 도쿄 등 세계 주요 도시에는 시네마테크 전용관이 있고, 국내에서는 시네마테크 부산이 전용관을 갖추고 있다. 서울에서는 2002년 설립된 가 그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해왔다.

시네마테크 건립을 위해 필름을 기증한 감독들(사진 제공=)
오는 3월 말에 현재의 낙원동 허리우드극장과의 계약이 끝나는 는 2005년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옮긴 데 이어 또 다시 짐을 꾸려야 한다. 내년이면 벌써 창립 10년이 되지만 여전히 전용관을 확보하지 못하고 매년 임대공간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이날 추진위 발족식에서 봉준호 감독은 전셋집과 월셋집에서 생활한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시네마테크가 번듯한 보금자리 없이 몇 년마다 보따리를 싸고 옮겨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것 같다"고 말하며 영화인으로서 반성의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동안 영화인들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열어 시네마테크 전용관 마련을 위한 문화운동을 펼쳐왔다. 2007년에는 시네마테크 전용관 설립을 정부에 제안하며 영화진흥위원회와 서울시의 지원으로 다양성영화 복합상영관을 건립하는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다. 그 이듬해에는 영화진흥위원회가 200억 원 상당의 건설비 제공을 공약하며 전용관 설립에 잠시 청사진이 켜졌지만, 영진위 위원장의 교체와 함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 하나의 위기는 영진위의 '시네마테크 전용관 공모제' 선언이다. 영진위로부터 그나마 적은 액수로 지원되던 예산이 중단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나아가 영진위는 를 대신해 허리우드극장 측과 직접 계약하겠다고 나서 간접적인 압박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왜 시네마테크가 필요한가

서울아트시네마
"지금도 예술영화관들이 있는데 왜 굳이 시네마테크가 필요하지?"

이제는 디지털 환경의 발전으로 고전 예술영화들을 DVD로 언제든 볼 수 있게 됐다. 심지어 P2P 프로그램을 동원하면 예술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파일'들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명화들을 보유하고 관람할 수 있다면 시네마테크의 필요성에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이에 대해 '함께 보는 영화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내가 감동을 받을 때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와 함께 탄식의 한숨을 쉬고야 마는 그 숨소리를 듣고 싶다. 그래서 나와 함께, 바로 그 순간,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함께 나누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서 위대한 순간에 우리는 감동으로 연대한다."

추진위 건립을 위한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감독들에게도 시네마테크는 추상적인 애정의 공간이자 구체적인 영화 공부의 공간이다. "'야메' 시네마테크 시절이던 90년대 초반부터 무분별한 불법 복제 테이프를 봐왔다"고 털어놓은 류승완 감독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와일드 번치' 영화를 비디오나 DVD 같은 걸로 서른 번 넘게 봤는데, 프린트로 보는 순간 내가 그동안 봤던 게 자료에 불과했다"며 프린트의 힘을 찬양했다.

김지운 감독은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100여 편의 영화를 본 경험을 이야기하며 "보잘 것 없는 영혼이 좋은 영화를 통해 더 악화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농을 던졌다. 그는 "시네마테크를 통해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을 계속 할 수 있었다"며 시네마테크를 '은총의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추진위의 위원장을 맡은 이명세 감독은 자신이 영화학교를 다닐 때 시네마테크의 부재를 아쉬워한 경험을 말하며 "이 귀중한 보물창고를 잘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99년 설립된 시네마테크 부산은 연간 6억 원의 안정된 지원을 받으며 풍부한 영화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시네마테크 공간이다. 잇따라 천만 관객 영화를 만들어내고 세계적인 거장 감독들을 배출해내는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벌어지는 상황과는 너무 다르다. 외에도 군소 예술영화관들은 사실상 언제 폐관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비단 열악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한국영화문화의 미래를 위해서 시네마테크 서울의 건립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영화인들의 설명이다. 수많은 영화들이 있고 편안하게 이용하는 관객들의 모습은 도서관처럼 정체되어 있는 듯하지만, 결국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를 후원하고 지지하는 데 그친 시네마테크 운동은 영화인들이 주체가 돼서 정부와 기업, 관객을 설득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며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됐다. 영진위도 적극적인 협조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10주년을 앞둔 올해 의 다음 행보에 영화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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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