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를 감시하다] 휴대전화, CCTV, GPS 등 '시각의 비대칭성' 부추겨

연극 '에쿠우스'
'소년은 왜 말의 눈을 찔렀는가.'

26마리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열 일곱 살 소년의 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 <에쿠우스>. 청교도적인 생활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공동체 규율에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자란 앨런은 그러나 성적 욕망이 가득한 사춘기 소년이다. 부모의 가르침이 모든 행위의 준거이자 심리적 억압기제였던 그에게 성은 곧 거부할 수 없는 '악'이었다.

말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던 소년은 여자친구와의 첫날 밤을 보내던 마구간에서 말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 눈을 잔혹하게 찌른다. 그날 밤, 자신을 바라보던 감시의 눈(말의 눈)에 대한 극렬한 저항은 부모(권력)의 규율을 내면화한 자신의 시선이기도 했다.

앨런이 거부했던 감시의 시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상이 되었다. 휴대전화, 골목과 건물 내부를 점령한 CCTV, 신용카드, 회사 인트라넷, 인터넷 접속과 이메일, 그리고 인공위성과 통신하며 위치를 알려주는 GPS(Global positioning system)까지. 우린 하루에도 수백 번씩 자신을 감시자에게 노출하고 있지만 감시 시스템이 편리함과 결합할수록 통제된다는 감각은 무뎌진다.

지문, 홍체, 손등의 정맥, 얼굴모양, 목소리, 사람의 다양한 생체 정보가 전자화되고 고유번호가 적힌 소형 칩을 몸 안에 이식하는 기술도 전 세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다. 엄청난 비밀이 아닌, 사소한 정보들이 모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미래마저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감시가 내포한 거대한 위험성이다.

2040년, 전체주의 국가가 된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시각의 불평등

미셸 푸코는 근대사회가 되면서 과거 '구경의 시대'에서 '감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통찰한 바 있다. 즉, 대중의 눈이 특정한 소수 혹은 특정한 이벤트로 모아지는 시대에서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다수의 사람들이 관찰되는 시대라는 의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푸코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설계한 '파놉티콘'의 구조를 분석한다. 감옥뿐 아니라 학교, 병원, 사무실, 공장 등 사람이 모인 모든 곳에 적용될 수 있는 이 구조는 근대사회에서 감시와 통제를 위한 훌륭한 시스템이다.

'파놉티콘', 즉 감시의 핵심은 '시각의 비대칭성'에 있다. 누군가 나를 볼 수 있지만 나는 그 누군가를 볼 수 없는 불평등한 시선. 학교의 교단이나 직장의 자리 구성도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통제수단으로 인해 '빅 브라더'로부터 감시당하는 사회를 그린 조지 오웰의 <1984년>. 1984년 벽두,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오웰에게 한 수 가르칠 수 있는 텔레비전 쇼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방영하는 대규모 이벤트를 펼쳤다. 그러나 현재, 인공위성이라는 전 지구적 감시 시스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백남준의 반박에 대해 더 이상 동의의 미소를 지을 수가 없다.

CCTV왕국, 영국의 그래피티 화가 뱅크시의 외벽 작품
다각화된 감시, 우린 어디로?

전자, 정보 시대로 접어들면서 감시의 시선은 단지 하나의 거대 권력에 머물러 있지 않다. 국가기관의 감시, 인터넷 사용,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 이메일, 휴대전화 가입자 신상정보와 통화시간 등이 수사기관에 열려 있다.

기업에 의한 소비자 정보수집도 활발하다.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할 때도 관계사에 신상정보가 활용되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으면 아예 가입조차 되지 않는, 감시에 대한 '강제적인 동의'가 일상화되었다. 신용카드나 백화점 카드를 이용하는 소비자 프로필 수집, 직장에서의 CCTV감시, 인트라넷, 이메일, 출퇴근 체크 카드에 이르기까지.

영화 <트루먼 쇼>와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채일 정도로 넘쳐나고 개인간의 몰래카메라나 시민 보상금제 등의 상호간의 감시 등 감시의 시선은 한계를 모르고 증폭된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시대인 것이다.

홍성욱 교수(서울대 생명과학부)는 <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을 통해 "전자 파놉티콘 혹은 정보 파놉티콘이라 불리는 이런 변화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이들에게 규율을 강제한 메커니즘은 시선에서 정보로 진화했다"고 해석한다.

감시하는 권력을 반대로 감시하는, 역감시 역시 언론, 시민운동, 시민언론,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정보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소수의 보이지 않은 이들에 의해 거래되고 분석된다. 역감시 역시 권력의 술수 앞에서는 바위에 계란치기인 경우가 다반사다.

"우리나라는 지금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소요를 일삼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완력을 동원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부터의 위험, 또 외부로부터의 위험. 우리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 없이 우리나라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버드 법대 졸업생의 연설에 좌중은 오랜 박수로 환호했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 학생은 이 연설이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문이었음을 밝혔다.

최근 영면한 진보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그의 저서 <오만한 제국>을 통해 소개한 일화다. 감시가 만연한 사회, 그것은 필시 자유를 옥죄는 통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법과 질서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안에 정의가 있느냐는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 그의 사상이 감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효용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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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