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갤러리] <장소의 기록, 기억의 재현> 전

박완순, 콘트리트 위에 빚어낸 장식
도시는 매일 허물어지고 지어진다. 거리는 숨가쁘게 변하며, 곳곳에 공사 현장은 예사다.

그러나 이는 도시를 조망하는 시선에서나 무감한 현상이다. 조감도가 아닌 삶을 통해 도시를 만나는 우리에겐 몸에 닿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다.

재건축 직전 건물의 을씨년스러움은 이익과 발전을 추구하는 도시의 기제에 밀려나는 공포를 일깨우고, 점점 웅대해지는 마천루의 위압감은 행인의 눈을 가린다.

우리는 가림막 너머에서 전해오는 소음과 진동의 불분명함을 견디며, 꾸역꾸역 관통하며 살아간다.

이런 변화의 경험은 몸에 차곡차곡 쌓인다. 도시라는 임시 거처에서 속도전에 닳아갈 수밖에 없는 임시 거주민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 불안한 상황은 종종 삶을 편협하고 각박하게 만든다.

이예린, 갤러리빙
그러니 입맛이 없을 때 찾던 오래되고 허름한 밥집이 갑자기 문을 닫았거나,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섭섭함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건축전문지 <공간>은 통권 500호를 맞아 도시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도 현실적인 대응책을 하나 고안해냈다. 건축사진가와 작가들에게 도시를 기록하도록 의뢰한 것이다.

현대 건축이 태동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건축물을 대상으로 삼았다. 작년 한해동안 <공간>에 실린 이 작업들은 우리 도시와 사회의 현황과 역사, 욕망과 가치관이 투사된 프리즘이었다. 이를 모아 <장소의 기록, 기억의 재현> 전을 연다.

60년대 건축물의 조형적 디테일을 줌인해 역사 속 아름다움을 발굴한 시선이 있는가 하면(박완순, <콘크리트 위에 빚어낸 장식>), 건축물 표면에 주변과 과거의 풍경을 끼워 넣음으로써 건축물과 도시 간 조응을 담은 시도도 있다.(이예린, <갤러리빙>)

한성필의 테마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인 <공간> 건물이다. 1960년대에 그려진 건물의 도면을 바탕으로 내부 공간을 떠올렸고, 그 상상을 사진으로 찍어 건물 외벽에 걸었다. 작년 7월 진행된 이 설치 퍼포먼스는 도시의 경관으로서의 건축물과 도시에서의 삶의 관계를 질문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도균, m.kcu8909
김도균은 건축물에 대한 기억을 기록했다. 그는 건축가 김중업의 제주대학교 본관을 찍어 제주대학교 김태일 교수가 1989년에 찍은 사진과 겹쳤다. 하나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두 사람 간 인연이 생기고 20년의 시간이 지나가는 풍경이 펼쳐진다.()

강홍구 작업의 핵심은 시야를 일그러뜨리는 방식이다. 그는 재개발 지역 사진에 종종 어그러진 지층의 단면처럼 보이는 균열을 넣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마음이자 그곳을 터전으로 한 삶에 대한 알레고리다.

도시에서 먹고 자고 돈을 벌고 관계를 맺는 우리 모두 저렇게 지진 겪듯 살고 있다. <어린이회관>은 아예 풍경을 나누어 놓았다. 그곳은 언젠가 소년 강홍구의 '로망'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나 잦고 격정적인 지진들을 겪어왔기에 작가의 단절감이 저리 또렷한 걸까.

<장소의 기록, 기억의 재현> 전은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공간화랑에서 26일까지 열린다. 02-3670-3639.


강홍구, 어린이회관
강홍구, 불광동 성당
김용관, 안녕-세운상가
한성필, The Ivy Space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