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그리다/공연] 연극 <뷰티퀸>, <에이미> 등 가족이 직면한 위기 되돌아보게 해

연극 '뷰티퀸'
무엇이든 지나치면 해가 된다. 사랑마저 그렇다. 자식에 대한 관심도 지나치면 집착이 된다. 영화 <올가미>의 윤소정, <마더>의 김혜자가 무서웠던 이유다.

지난해 무대까지 불었던 '엄마' 열풍은 힘들고 삭막해지는 현실에 애틋한 가족애를 환기시킴으로써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가족을 재등장시켰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하던가. 세상 모든 가족이 해피엔딩을 가질 수 없듯, 무대 위 가족의 모습도 그 다양한 군상을 적나라하고 아프게 보여준다.

연극 무대는 더 이상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선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태로운 가족들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현실의 가족이 직면한 위기를 되돌아보게 한다.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뷰티퀸>은 엄마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통념을 무참히 깨버린다. 여기서 자식을 위해 늘 희생하는 엄마는 없다. 오히려 딸이 엄마의 인생을 위해 마흔이 넘도록 자신의 인생을 소모'당해' 왔다.

연극 '엄마를 부탁해'
죽을 때까지 딸을 붙잡아두려는 엄마의 속내를 안 딸은 엄마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딸의 사랑마저 무자비하게 가로막은 엄마는 마침내 그 딸에 의해 처절한 결말을 맞게 된다.

<뷰티퀸>은 지난해 나타난 '엄마 신드롬'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이다. 건강한 표현과 제대로 된 귀기울임이 없을 때, 가족은 그 본래의 기능을 잃고 그냥 '동거집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가족은 나를 감싸안는 따뜻한 품이 아니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괴롭히는 지독한 악의 구렁텅이가 될 수 있다.

극단 컬티즌이 국내 초연으로 선보이는 데이비드 해어의 <에이미>는 부모-자식, 혹은 형제-자매의 갈등이 아닌 장모와 사위의 갈등을 그렸다. 장모 역의 윤소정은 언뜻 <올가미> 때의 편집증적 엄마를 연상시키지만, 이 연극에서 드러나는 두 사람의 대립은 개인의 성격차가 아니라 세대 간의 견해차에 뿌리를 둔다.

각각 '연극'과 '미디어'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은 장모와 사위로 대표되는 신구 세대 간의 불편한 동거를 말해준다. 장모에게 사위는 무능한 영화감독일 뿐이고, 사위에게 장모는 낡은 방식만을 고집하는 고집불통이다.

작품의 원제인 Amy's View가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부분이다. 딸 에이미의 시선은 옛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의 충돌을 균형 있게 바라본다.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그의 시선은 결국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된다.

연극 '에이미'
극단 드림플레이가 신진 연출가 양성을 위해 마련한 '겨울잠 프로젝트'는 <가족오락관>이라는 올해 행사 제목과는 달리, 해체되는 가족을 다루고 있다. 그 첫 번째 작품인 <죽어도 가족>의 가족은 3류 양아치와 뇌기능 이상 동생, 그리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장기밀매 브로커 이모의 피폐한 구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가족은 떨어져 있어도 그립고 보고 싶은 피붙이가 아닌, 같은 공간에서 사는 생활공동체에 불과하다. 이모는 결국 몰래 형의 장기를 빼내고, 그를 꼬드겨 동생의 장기까지 꺼내려는 '막장' 시도를 한다. 형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아버지나, 돈을 위해 조카들의 장기를 노리는 의붓이모의 존재는 관객에게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난해 초연에 이어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르는 극단 프랑코포니의 <고아 뮤즈들>은 사랑에 빠져 자식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 남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부모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네 남매는 20년 만에 어머니로부터 집에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고 한 자리에 모인다.

버림받은 상처 속에 각자의 길을 살던 남매는 지난 고통들과 남겨진 상처를 마주하며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 없이 성장한 황량한 삶은 모래라는 상징으로 표현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큰딸은 아이 열두 명을 갖고 싶었다고 절규한다. 그들에게 엄마는 보고 싶기도 하고, 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부모의 영향이 자식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예는 경쾌발랄한 뮤지컬에서도 볼 수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뮤지컬 <모차르트!>는 그 유명한 천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모차르트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고, 자유를 갈망하는 모차르트는 베버 가족을 대안가족처럼 느꼈지만 그를 이용하려는 속셈은 마찬가지였다.

연극 '고아 뮤즈들'
가족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바랐던 모차르트는 그 때문에 갈등하고 괴로워하다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한 죽음을 맞고 만다. 그는 극 속 노랫말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해줘"라고 마음 속의 가족에게 말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일방향적 관계를 비판적으로 다루며 가족애의 다양한 일면을 다루고 있는 양상에서 전통적인 가족애의 환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도 적지 않다. 엄마 신드롬의 대표격인 신경숙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연극 <엄마를 부탁해>가 꼽힌다.

원작과 연극이 공히 주장하는 것은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신경숙 작가는 원작을 통해 "엄마가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깨졌으면 좋겠다. 엄마와 자식 사이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가 모성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이 같은 모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연극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연극은 엄마를 잃어버린 현재에서 출발해 남편과 자식들 등 남겨진 가족들의 기억을 통해 엄마의 참모습을 짜맞춘다. 결국 '엄마'라는 존재를 통해 태어나고 자란 모든 자식들은 원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이 이야기는 비로소 '엄마'를 한 인간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성장통을 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실종'을 통해 '모성'이라는 키워드를 현대적 시각과 사회적인 맥락으로 다시 읽으라고 주문하고 있다.

연극 '가족'
독신이나 이혼, 핵가족 등으로 파편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전통적인 가족애의 강조는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순혈주의적 가족관에서 벗어나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들의 연대를 통해 또 한 번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가족> 같은 작품들은 어떤 시대에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해와 사랑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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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