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권 시계는 반대로 가나]문예위 '불법 폭력시위 불참 확인서' 제출 요구… 민예총·작가회의 등 강력 반발

마포구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열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확인서 제출 요구에 따른 한국작가회의의 입장표명 기자회견'에서 도종환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염무웅, 한기영 상임고문, 이명원 대변인(왼쪽부터)이 입장 표명을 하고 있다.
구타를 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찢어진 옷엔 케첩까지 묻어 있다.

밀가루를 뒤집어 쓴 채 옷을 모두 벗은 학생들은 이내 인간 피라미드까지 쌓는다.

중요 부위를 가리고 담 아래에 서 있는 여학생들과 그것을 찍는 선배들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도를 넘은 학교 폭력의 현재를 볼 수 있었던 한 중학교의 졸업식 사진과 동영상 속 모습들이다.

당사자들의 충격과 피해는 현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얼굴까지 그대로 노출된 사진 속 졸업생들은 곧 실명과 나이, 학교까지 밝혀져 2차 피해로 이어졌다.

이 같은 2차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인터넷 사이트 게시물 중 해당 동영상에 대해 삭제 조치를 취했다.

인권의 문제는 도처에 있다.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등 그동안 잘 알려진 인권 담론의 대상들만 인권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찍힌 사진이 조작된 채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거리를 지나가다 뜬금없이 물대포를 맞으며 구타당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불쾌한 몸의 침범을 당할 때, 인권은 쉽게 훼손당한다. 심지어 장애나 성적 다양성, 이주노동의 문제 역시 남의 일만은 아닌 세상이다.

이번 졸업식 동영상 사건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학생들의 현재를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 사용에 능한 세대에게 기본적인 인권교육조차 시키지 않은 점에 대해서 교육 행정당국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크다. 50여 년 전 누벨 바그의 기수 프랑수아 트뤼포는 소년이 학교와 사회가 가진 지배-복종의 메커니즘에서 몇 년간 겪는 폭력성을 '400번의 구타'로 표현했지만, 지금은 몇 번의 클릭만으로 소년은 하룻밤 새 만신창이가 될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인권 문제는 표현의 자유 사안에서 두드러진다. 미국의 대법관 윌리엄 더글라스는 <민중의 인권>에서 "표현의 자유는 민중이 완전히 주권을 장악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치적 권리"라고 말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민중은 획일주의에 갇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2008년 광우병 파동에서 시작된 일련의 시민 행동들은 지금 정부에 의해 단순한 '불법 집회'로 간주되고 있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지만, 유독 이번 정부에서 그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얼마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가 문예진흥기금사업에 선정된 단체에 대해 '불법 폭력시위 불참 확인서' 제출을 요구한 것은 문화예술인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이 받은 확인서에는 '본 단체는 2008년도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소속되었으나 실제 불법 시위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향후 불법폭력시위 사실이 확인될 경우 보조금 반환은 물론 관련된 일체의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영화 '400번의 구타'
마치 일제강점기의 굴욕적인 투항 각서를 연상시키는 이 문서에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까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올해 문예진흥기금사업으로 선정된 한국작가회의를 비롯해 대구민예총과 전북민예총 등 전국 대다수 광역 지자체 문화예술 지원 부서에서도 이 확인서가 강요되는 사태가 벌어져 문화예술인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에 지난 10일 민예총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의 이 같은 태도를 '21세기 문화다양성 시대에 역행하고 문화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심각한 인권 유린'이라고 규정지었다. 민예총은 "정부의 일방적이고 자의적 판단으로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꾸준히 쌓아올린 국가 품격과 이미지를 훼손하여 국가적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며 "정부의 구시대적 사전 검열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뒤를 이어 20일에는 한국작가회의가 17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정기총회를 열고 문예위가 지원하는 보조금의 거부와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전개키로 의결했다.

이날 총회에서 제18대 작가회의 이사장에 선임된 구중서 평론가는 "좋은 언어로 존재의 본질을 되새기고 비인간화한 현실을 정화하는 것이 문학인의 책임"이라고 말하며 "모든 문화예술•인권•사회운동 단체와 함께 진정한 사회 발전과 창조적 대안을 추구할 것"이라고 방침을 밝혔다. 문인들의 집단 반발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으로, 특히 이번 '저항의 글쓰기'는 군사정부의 퇴장 이후 다시 등장한 이례적인 집단 행동이다.

대중이 인권에 대해서 그나마 가장 잘 고민해볼 수 있는 통로도 막혔다. 1월 27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한국다양성영화발전협의회를 독립영화전용관 지원사업 대상자로, 시민영상문화기구를 영상미디어센터 지원사업 대상자로 선정했다.

각각 11월과 1월에 생긴 낯선 단체들이 영화단체 지원사업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은 단체들을 제치고 선정된 것에 영화계는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서울국제노동영화제, 서울인권영화제, 인디포럼 등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실천하던 단체들의 이번 탈락은 지난해 촛불 집회 참가로 인한 영진위의 의도적인 배제의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95년 국제적 공인을 받아 탄생한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으로 인해 어떠한 강제, 불이익이나 제재를 받아서는 안 된다"이다. 그것은 또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 평화적인 행사를 국가안보의 위협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이에 대해 어떠한 규제나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지금의 상황은 요하네스버그 원칙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재가 인권을 대규모로 침해할 때 그 시작이 표현의 자유라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인권연구소 '창'의 류은숙 활동가는 자신의 저서 <인권을 외치다>에서 "인권을 침해하는 권력이란 나치가 그랬듯이 제 입맛에 맞지 않는 표현을 불태워 없애버리거나, 그 전에 불태울 만한 표현을 한 사람들부터 없애버린다"고 말한다. 오늘날 문화예술계가 봉착한 현실과 놀랍도록 닮은 역사는 그대로 현재 한국의 인권 환경의 퇴보를 증명하고 있다.

▶▶▶ 한국인권 시계는 반대로 가나 ◀◀◀
▶ 시대착오적 인권 침해에 문화예술계 화났다
▶ 스크린에 투영된 우리의 인권, 뒤돌아보니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