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여성작가로 사는 법] 2000년대 여성문학은

얼마 전 2000년대 소설을 나름대로 결산해 보자는 취지의 좌담에 낄 기회가 있었다.

이런 자리라면 '2000년대 소설'이라는 대상이 먼저 있고, 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게 상식적인 순서일 테지만, 딱하게도 그런 대상이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

결국 몇 시간 동안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더듬 주워섬기다가 끝날 때쯤 해서 '이런 걸 2000년대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대단히 의심스러운 단상 몇 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마도 이런 사정은 2000년대 여성작가와 그들의 소설을 얘기하는 자리라고 해서 썩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뒤에 오는 자의 권리(생떼에 가까운)이겠으나 2000년대 소설이 아니라 90년대 소설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좀 더 쉽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90년대 소설은 '거시담론에서 미시담론으로' 혹은 '이념(정치)에서 문화로'라는 세계사적 변혁에 발맞춰 일상이나 욕망, 성(性)과 사랑, 가족 등을 새롭게 아니면 다시금 불러냄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증명했다는, 꽤 적절한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또, 거시담론이나 이념의 영역 안에 여성이 억압된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었으니 90년대 소설의 대표적인 속성은 여성적 글쓰기의 그것과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념에 비해 문화란 얼마나 다양하며, 거시담론에 비해 미시담론이란 또 얼마나 세세한가.

요컨대, 90년대 소설이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의 전화를 드러내고 있다면, 다시 일원론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2000년대 소설에서 90년대 소설만큼의 충격적인 변화를 찾아내기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생떼도 이런 생떼가 없다. 뒤에 오는 자는 앞서간 자가 폼 날 만한 일들을 이미 다 해치워버렸다고 떼쓸 권리만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에서 할 일을 찾아 이를 통해 자기를 증명할 권리(이자 의무) 또한 갖는다.

가령 90년대 소설의 여성 주인공을 예로 든다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것으로 믿어진 오이디푸스 구조 안에서 조신한 요조숙녀로 자라기를 요구받았을 그녀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법이 구성한 현실의 균열과 결여를 포착하고 이를 넘어설 권리를 행사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대 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어떤 권리가 주어졌을까. 글쎄, 권리라고 하기엔 왠지 서글픈, 그런 권리다. 아버지의 위선이, 현실의 부조리가 부정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아버지 없이, 또는 좋은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현실을 맞으리라는 법은 없으므로, 최악의 경우 그들은 위선적인 아버지와 함께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아버지와 현실을 재차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뭔가 다른 방도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이다. 몇몇 젊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통해 이와 관련된 사례를 찾아보면 이러하다.

첫 번째 경우는 가족 서사의 형태를 띤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의 주인공에게는 아내와 곧 태어날 딸을 버리고 달아난 허랑방탕한 아버지가 있다. 어린 주인공은 그런 아버지가 시곗바늘 돌 듯 둥근 지구를 달리는 중이라고 상상한다. 시곗바늘이 도는 건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조건 도는 것이니 딸이 태어난다 해도 그냥 돌아야 하지 않겠는가.

죽어라 달리고만 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미국 어딘가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음이 밝혀지자 그녀의 삶은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씌워줌으로써 아버지를 시곗바늘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일 때, 그녀는 오히려 좀 더 성숙해진다.

정한아의 <마테의 맛>의 주인공에게는 위선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으나 너무 쉽게 세상에 상처받는(그런 점에서는 위선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좀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아버지가 있다. 그녀가 호감을 품고 있는 한 남자 역시 비슷한 성격인 것 같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들이 곁에 있는 건 그녀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이니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마음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마테차의 향기처럼 그들을 감싸 안는다.

두 번째 경우는 일종의 현실 풍자이다. 염승숙의 <채플린, 채플린>에는 '여봇씨요' 증후군이 유행하는 도시에서 가짜 하객이나 문상객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누군가 어깨를 톡톡 치며 '여봇씨요'하면 온몸이 마비된다는 엉뚱한 증상의 '여봇씨요' 증후군이 도시를 공포로 몰아가는 과정을 '믿거나 말거나' 식의 입담을 통해 서술하는 <채플린, 채플린>은, 실은 조금도 낯설 것 없는 친밀감의 표시인 '톡톡, 여봇씨요'가 억압되고 반대로 위선과 허울과 가짜가 판치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윤고은의 <1인용 식탁>은 "산악인에게 에베레스트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고깃집이 있다"를 모토로 내세워 혼자 밥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을 꾸며 낸다.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이수한 학원생들의 수료율은 의외로 낮지만 학원 경영에는 문제가 없다.

학원생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여럿이 함께 밥 먹는 식탁이 아니라 여럿이 모여 있지만 자기만이 돋보일 수 있는 식탁이기 때문이다. 학원 수업은 그들의 허위의식과 나르시시즘을 만족시켜 주는 손쉬운 방법이기에 등록은 끊이지 않는다. 이런 현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해 봤자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면, 아무튼 풍자가 대안일 수 있다.

요컨대, 젊은 그녀들이 시시한 아버지와 더불어 혹은 아버지를 부축하며 얼마나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려거든 김애란과 정한아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또, 시시한 현실이 풍성한 입담이나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통해 풍자되는 장면을 보려거든 염승숙과 윤고은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이를 아버지와 아버지의 현실이 부정되는 것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뒤에 오는 자의 정당한(생떼가 아닌) 권리이리라.



이수형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