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반란] <스텝포드 와이프>, <인형의 집> 등 다양한 모습 담아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
최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여기자 포럼에서 한 '현모양처 발언'은 여성들의 분노를 샀다.

"나는 여성들이 직업을 갖기보다는 현모양처가 되길 바란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 꼭 결혼해서 최소한 애 둘은 낳아 달라" 등의 발언에 대한 대부분 여성들의 분노는 '성 역할의 고정'이라는 데 있지 않았다.

대통령의 멘토라는 그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데 있다. 왜 기혼 여성들이 출산파업을 하는지, 왜 해마다 혼인건수가 떨어지는지, 왜 여성들이 취업전선에 뛰어드는지를 그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위원장의 말로 '모멸감'을 느꼈다는 한 시사지 여기자의 자전적 후속기사는 여성들 분노의 발로를 정확히 짚어낸다. 친정어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이 둘을 키울 수 없을 거라던 기자는 최 위원장의 '현모양처론'을 개그콘서트의 행복전도사로 패러디했다.

'여러분, 힘들면 그냥 집에서 애 키우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괜히 바깥일 하면서 불평하고 국가 욕하고 그래요? 꼭 돈 없어서, 팔자 세서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처럼요. 다들 집에 애 봐주는 보모 셋 정도는 있잖아요. 직장은 시집가기 전까지 잠깐 액세서리 삼아 다녀보는 거잖아요. 남편이, 남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은 알아야 현모양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안 그래요, 여러분?'

연극 <인형의 집>
소통의 시대는 내가 타인의 삶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뼈저리게 자각하게 하는 시대다. 이 같은 불통이 가정으로 축소되면 아내에 대한 판타지를 키워내고 결국 변종의 아내를 양산한다. 게임 캐릭터와 결혼한 남자가 생기는 극단의 현상은 한 명의 변태 얘기가 아니다.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에는 완벽한 아내들이 등장한다. 바비 인형 같은 외모에 뛰어난 요리와 살림 솜씨, 남편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반대로 자신은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 큰 키의 '인형'들은 남성이 꿈꾸는 이상적 아내의 판타지를 제공한다. 결국 남편들이 아내들 머릿속에 심어두었던 칩의 정체가 들통나면서 이 소극은 싱겁게 마무리되지만 지나칠 수 없는 질문을 뇌리에 남긴다. "남성분들, 정말 이런 아내랑 살고 싶으세요?"

이 같은 아내에 대한 판타지는 노라에게서도 발견된다. 연극 <인형의 집>의 제목처럼 키 큰 인형 혹은 몸만 자란 어린 여자아이인 채로 노라는 아이 셋을 낳았다. 결혼 전까지는 아버지에 의해, 결혼 후에는 남편에 의해 '양육'되었음에도 행복하다는 망상에 빠져 있던 노라는 정작 자신에게 닥친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는 남편 헬머를 보고 절망감에 빠진다.

'나의 작고 귀여운 종달새'라고 불리던 노라의 존재는 헬머의 이기심 앞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만다. 노라는 결국 아름답게 치장된 채 남편을 즐겁게 했던 드레스와 신발을 벗고 집을 나간다. 포도주를 머리에 부으며 하나의 인격체로 다시 태어난 자신을 축복하고서.

130여 년이 지난 지금 노라가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은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인형의 집>은 여전히 효용성을 갖는다. 집안의 살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 현대를 살아가는 아내의 삶은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일하는 여성 린네 부인과 노라의 모습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과 일을 찾는 린네 부인과 가족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노라는 현대의 슈퍼 우먼 혹은 슈퍼 맘이라는 이름으로 숨어들었다.

"이 작품이 현대 여성과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래 고민했다. 단지 여성뿐만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각자가 '이상적인' 아이, 남편, 아내를 꿈꾸고 있지만 결국 현실에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이 작품이 여전히 고전인 이유다."(백순원 연출가)

이들 작품에 은유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연극 <아내들의 외출>(박춘근 작)은 보다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내용이다. 자살, 존속 살해 등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지는 기혼 여성들의 우울증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담겨 있다. 젊은 시절 남편의 외도로 마음고생을 겪고 치매 증상이 나타나는 엄마, 조기 폐경으로 우울증을 앓는 딸, 수퍼우먼 강박증에 시달리는 며느리는 함께 여행을 떠난다.

돌아오는 길 낯선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쳐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그들은 묵은 감정을 드러내며 서로의 마음을 할퀸다. 그들이 놓친 것은 비단 비행기뿐 이었을까? 10여 년 이상을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왔지만 세 명의 여자는 늘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심리적인 거리감이 물리적인 거리감으로 드러나는 순간, 유서가 가방 속에서 발견되면서 그들 사이의 긴장감은 폭발한다.

우울증은 곧 '외로움증'이라고 말하는 박혜선 연출가는 연극 속에서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거울이란 장치를 놓아뒀다.

"거울은 나를 비추기도 하지만 나를 '다시금' 보게도 만든다. 이 거울은 투명해지기도 하는 블랙 미러다. 엄마가 자신도 보고, 며느리도 보고, 딸도 볼 수 있다. 그 장치를 통해서 우린 우리를 보고 있는지, 남을 파악하고 있는지를 질문해보고자 했다."

슈퍼우먼 며느리는 낯선 공항에서 외친다. 한 번도, 누구에게도 해보지 않은 '나약함이라 여겼던'말들을. "살려줘요! 여기 사람 있어요. 여기..사람.. 난 괜찮지 않아요. I'm NOT okay! 내가 여기저기서 당하고 있는데 왜 나한테는 관심이 없죠?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죠? 아무리 소리를 쳐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 여기 이렇게 내가 있는데.."

쿨한 척, 건재한 척, 의연한 척, 건강한 척 제각기 가면 하나씩 가지고 '가장무도회'를 하듯 살아가는 아내들. 그들의 건강한 변화는 이 같은 독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면과의,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의 솔직하고 진지한 대화가 그 시작일 거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