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오래된 미래, 장르소설]기술발달과 문화예술 혼종성 대세 이루며 주목… 창작 여건은 여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3월 개봉한 두 편의 영화가 눈길을 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0여 년 후 일의 상상한 이야기다.

25일 국내 개봉하는 영화 <제로 포커스>는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제로의 초점>을 원작으로 했다.

이 두 영화는 공통점이 있다. 이미 '세계의 고전'이 된 탄탄한 원작에 감독의 상상력과 영상이 만나 영화적 완성도를 이룬다는 것. 이는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과 같이 2000년대 전 세계적인 흥행 영화의 원천이 환상문학이라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장르소설을 육성하자"는 해묵은 주장은 이제 국내 문화계에서도 담론에서 실행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해 멀티문학상을 받은 김이환의 소설 <절망의 구>와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이 나란히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반지의 제왕>
김이환의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정체불명의 구가 나타나 사람들을 빨아들인다는 SF소설, <국가의 사생활>은 2016년 북한을 흡수 통일한 남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 느와르, 미스터리, 스릴러, 블랙코미디를 혼합시킨 장르소설이다.

문화계가 장르소설에 주목하는 이유, 그럼에도 국내 장르소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계 '장르'에 주목하다

교보문고는 지난해 5월부터 장르문학 서비스 'Diky Story'를 실시했다. 로맨스, 무협, 판타지, 추리, SF 소설을 회원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다. 월정액권 2만 8000원에 구매한 2500여 종의 장르소설을 무제한 열람할 수 있다. 장르문학 시장의 한 축인 대여점을 노린 전략이다. 이와 함께 내놓은 소설분야 추이 분석결과가 더 놀랍다.

소설 내 장르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 소설분야 전년 대비 판매신장률은 2006년 13%, 2007년 18.1%, 2008년 11.1%로 나타났다. 이중 장르문학이 15.7%, 44.5%, 15.6%로 집계됐다. 전체 소설 신장률을 웃도는 수치다. 점유율 면에서도 2005년 1분기 18.8%였던 것이 2009년 1분기에는 26%로 올랐다. 판매액은 2005년 20.5%에서 2009년 30.1%로 급성장했다.

<제로 포커스>
포털사이트 다음은 기존 순수문학 위주로 제공했던 '문학속세상' 코너에 장르 스페셜 코너를 신설, 판타지 소설 등 장르문학으로 연재 영역을 확대했다. 김이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비롯해 이수영의 <싸우는 사람>, 하지은의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 등 장르소설이 각각 3~4개월 연재됐다. 네이버 역시 '오늘의 문학' 코너에서 대중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들어 속속 장르문학 전문출판사를 표방한 출판사(혹은 임프린트)가 설립되고 특화된 장르소설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2004년 민음사의 자회사 황금가지가 추리, 서스펜스, SF를 망라한 시리즈 <밀리언셀러클럽>을 펴내기 시작했다.

김영사의 자회사 비채는 2006년 무렵부터 영어권 스릴러에서 특화된 <모중석 스릴러 클럽>과 일본 추리소설을 중심으로 한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를 펴냈고, 웅진씽크빅의 임프린트 노블마인은 추리소설 시리즈 <뫼비우스의 서재>를, 역시 웅진씽크빅의 임프린트 시작은 <메두사클럽>과 <미도리의 책장> 펴낸다. 재작년에는 웅진씽크빅의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가 문을 열었다.

문학동네는 <블랙펜 클럽>시리즈를 통해 추리소설을 출간하고 있다. 올해 초 파란미디어에서 장르소설과 본격소설의 경계소설 격인 중간문학 브랜드 '새파란상상'을 만들었다.

장르소설 공모전은 최근 2,3년 사이 눈에 띄게 늘었다. 월간 <판타스틱>이 1월에 정리한 2010년 한국 장르문학 공모전은 모두 8개. 영화, 드라마 원작을 발굴하기 위한 '멀티문학상'을 비롯해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대한민국 문학& 영화콘텐츠 대전' 등이다. 장르문학에 대한 '니즈'가 문학계를 뛰어넘어 문화계전반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2010년은 일종의 분기점인 셈이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장르문학의 재발견

최근 문학을 비롯한 문화계가 장르소설에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박상준 대표는 "젊은 독자층을 중심으로 장르문학 수요의 저변이 넓어졌다"고 말한다. 젊은 독자들의 특징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주류문학(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이른바 '수준의 차이'로 보는 시선에서 자유롭고 이것이 장르문학 수요를 늘렸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장르문학의 재발견'이다. 영상매체가 발달, 보급되면서 장르문학의 '원소스멀티유즈'가 실행되고 있는 것이 장르문학이 새삼 각광받게 된 배경이라는 설명이다.

컴퓨터그래픽의 발달로 화면상에 어떤 초현실적인 상황이든 구현해 낼 수 있게 되면서 판타지, SF, 그래픽노블, 호러 등은 물론 스릴러나 미스터리까지 각 장르의 소설들이 속속 영화화 되고 있다. 때문에 각 장르 사이에도 일종의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 원작 출간 붐이 일고 이것이 영상매체 소비층에 의해 다시 소화되는 긍정적 피드백 현상이 나왔다는 해석이다.

소설가 박민규
마지막으로 20세기 말부터 문화계에 일어난 '장르 혼성 현상'이다. 각 문화예술 장르 사이에 융합 내지는 혼성 현상이 나타나 이것이 자연스럽게 주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허물면서 결과적으로 장르문학의 저변이 확대되는 효과가 나왔다.

영미문화권에서 말하는 슬립스트림(slipstream) 소설이 대표적인 예다. 슬립스트림 소설은 판타지와 주류문학, 판타지와 SF 등이 서로 융합된, 일종의 모던 환상 서사의 총칭이다. 이렇게 장르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장르문학에 대한 거부감도 흐려지고 주류문학의 젊은 작가들도 더 과감하게 장르문학 창작을 시도하게 됐다.

2000년대 장르문학

전문가들은 최근 장르문학이 과거 70,80년대와 현격하게 다르다고 말한다. 다양한 문학, 예술적 가능성들이 융합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 조성면 문학평론가는 "이인화, 김탁환, 댄 브라운 등의 작품처럼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결합된 팩션, <묵향>처럼 무협과 판타지를 결합한 판협지, <판란티어>,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처럼 판타지 게임과 추리와 SF가 공존하는 퓨전 소설이 한 예"라고 설명한다.

이 '혼종성'은 본격문학계에서 장르문학을 주목하는 이유다. 사실 문학계, 정확하게 본격문학이 장르문학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박민규, 김중혁, 윤이형 등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장르적 코드를 차용한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중혁
박민규는 단편 <절(말많을 절)>에서 무협지의 코드를 빌린다. 작가 김중혁과 윤이형 등의 몇몇 단편에서도 SF적 서사가 돋보인다. 씨 역시 판타지 코드를 접목시킨 <고구려 국선랑 을지소>를 출간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장르문학계는 순수문학 작가들의 '장르적 차용'에 대해 내심 반가워하는 분위기다. 무협 소설을 쓰는 작가 문영 씨는 "장르소설에는 특정한 코드가 있다. 추리소설의 형식, 코드를 갖춰야 추리소설이 된다. 이 코드가 일종의 진입장벽을 만들기 때문에 진입장벽을 독자가 넘어서지 못하면 독서를 방해한다.

장르소설이 발전하려면 진입장벽을 극복해야 한다. 본격문학 작가가 장르적 기법을 차용할 때 진입장벽을 낮춰주고, 장르소설을 쉽게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례로 <해리포터> 시리즈의 경우 판타지 소설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판타지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치를 높였다는 것이다.

한편 웅진씽크빅의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박성준 대표는 "2000년대 한국의 장르문학 작가들은 이전보다는 훨씬 풍부한 토양에서 창작을 하게 됐다. 영상매체와 번역출판 등으로 소개된 많은 해외 작품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소화하면서 장르의 문법이나 규칙 등을 훨씬 더 익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됐다. 이를테면 '장르문학의 글로벌스탠더드'에 근접해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스티븐 킹이 나오려면?

소설가 정지아
문화계의 이런 고무적인 반응에 대해 장르작가들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반응이다. 사실 한국문학 100년의 역사 중 장르문학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전무 하다시피했다. 한국 장르문학은 1930년대 김내성과 1970년대 김성종으로 대표됐다.

소설가 문영 씨는 "우리나라 장르문학 시장의 제일 큰 문제점은 단절성이다. 뛰어난 작가가 등장해서 1인 독주를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 작가의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니라 사라진다"고 말했다. 수십 만부씩 팔린 작품도 시간이 지나면서 절판되는 현상이 흔하기 때문에 이 작가들의 문학적 성취가 계 승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내 장르소설은 예전엔 전혀 주목받지 못하다가 이제야 아주 조금 주목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3일 <판타스틱>이 복간 3달 만에 다시 휴간한다는 공지가 나왔습니다. 이게 국내 장르소설의 현 상황입니다."

기술발달과 문화예술의 혼종성이 대세를 이루며 장르문학이 주목받고 있지만 국내 장르문학 작가들이 창작하는 여건은 예전과 비교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문화예술전문가들이 국내 대중문화 수준을 낮게 평가하는 분위기와 일맥상통한다.

스티븐 킹과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 해외 장르소설에는 격찬이 쏟아지지만 국내 장르소설의 경우 발표 지면이 거의 없는데다 제대로 된 비평계 조명이나 언론 보도조차 없다는 것. 독자들은 좋은 작가와 작품을 알지 못하고,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니 장르문학 작가의 발굴, 육성이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장르소설 시장의 한 축을 이룬 대여점시장도 이제 불법 복제가 만연해지며 무너졌다.

소설가 윤이형
"장르전문 출판사들이 이제 대여점시장에서 벗어나 서점시장에서 문장이나 스토리로 본격문학과 경쟁을 할 만한 작품을 출간하는 것을 목표를 삼고 브랜드를 출시하고 있습니다. 이 브랜드가 어떻게 시장에 정착하는지에 따라 국내 장르소설 시장이 판가름 난다고 생각합니다."

본격문학 중심의 한국 문학시장에서 국내 장르문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그리하여 문화계의 기대처럼 '원소스멀티유즈'의 화수분이 될 수 있을지 기대해보자.

작가들의 교사, 장르소설
통상 '장르문학=대중문학, 통속문학, 상업문학'으로 인식되지만, 장르소설과 대중문학은 엄격히 구분된다. 인터넷에 장르소설을 치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특정 장르의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 장르에 해당하는 소재, 주제, 양식 등의 특징에 맞춰 쓰여지는 장편 또는 단편 소설을 뜻한다.'

'특정 장르의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장르를 만든다는 점에서 대중을 의식한 소설임에 틀림없지만, 대중성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장르소설은 특정 형식의 말하기 기법 즉, 즉 문학적 코드가 있고 이 코드에 맞춰 쓴 소설을 뜻한다. 그 종류로는 범죄소설 추리소설, 판타지 소설, 무협소설, 공포소설, 로맨스소설, SF라 불리는 과학소설 등이 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는 월간 <판타스틱> 1월호에 발표한 <한국 장르문학의 현황과 전망 그리고 희망>에서 "장르문학은 고유한 서사규칙과 관습적인 특징과 정체성이 분명한 작품들을 가리키는 대안적 용어로 오늘날 가장 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펄프픽션(Pulp Fiction, 싸구려 통속소설) 취급받는 장르소설은 알고 보면 한국 근현대문학의 성장과 함께했다. 조성면 평론가는 같은 글에서 "여명기 한국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신소설의 대부분은 계몽주의의 가면을 쓴 통속문학 또는 신파들이었다"고 말한다. 조 평론가는 그 예로 1960년대 한국 현대소설의 기린아로 등장한 김승옥, 1990년대의 은희경을 든다.

김승옥은 김내성의 장르문학을 보면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고 은희경은 자신의 문학소녀 시절 스승이 박계형이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소설가 김훈 역시 한국 최초 무협소설 작가였던 아버지 김광주를 통해 문학적 소양과 자질을 기를 수 있었다.

김동인 역시 추리소설의 광팬이었으며 그 자신도 <수평선 너머로>란 추리소설을 쓰기도 했다. 채만식도 서동산이란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추리소설 <염마>를 연재했다. 카프 서기장을 지냈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장 박영희는 SF사상 처음으로 로봇을 등장시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카렐 차펙의 <로섬의 만능로봇>을 <개벽>에 연재했다.

조 평론가는 "상당수 작가들은 장르문학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거나 이를 창작(번역)하기도 하였음을 상기해본다면, 장르문학을 문학으로 인정하고 다루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평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