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 숲에서 길 잃지 않는 법]자라, 망고, H&M, 유니클로… 세계를 지배한 싸고 빠르고 트렌디한 옷들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옷 가게들이 명동을 점령했다.

400평짜리 매장에 놀랄 새도 없이 그 옆에 600평 복층 매장이 오픈하는가 하면 곧 또 한 집 건너 800평 매장이 문을 연다.

위풍당당한 쇼핑 4층 석탑 안으로 발을 들여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저기 올 봄 유행인 마린 룩을 연출하기에 좋은 경쾌한 하얀색 재킷이 눈에 띈다. 그런데 가까이서 만져보니 어째 품질이 영 시원치가 않다.

고급스러운 재킷의 생명은 착 떨어지는 소재와 1mm의 미학인 패턴에서 나오는 것일진대 그것까지 기대하기는 무리인가보다. 그러다 가격표를 발견한다. 7만9000원. 실망으로 삐죽하게 나온 입은 그대로지만 어느새 고개는 끄덕끄덕하고 있다.

"그래, 이 가격에 이 정도면 옷이면 뭐… 어차피 내년 봄에는 마린 룩을 입지 않을 테니까."

지금 잠깐 동안 당신이 느낀 호기심과 기대, 실망과 용서의 소용돌이가 바로 SPA의 본질이다.

사용법 1: 뚜껑을 연다

Special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이라는, 풀어 쓰면 너무 길고, 줄이면 너무 생소한 이 명칭을 선뜻 사용하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이것이 의류 제조·유통 업태에 관한 업계용어이기 때문이다.

갭의 피셔 회장이 처음 언급한 것으로, 한 회사에서 기획하고, 만들고, 파는 전 과정을 도맡아 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단어 그대로 제조직매형 의류전문점이라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곧 이 같은 시스템이 가져온 결과들 때문에 부가적인 의미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속도다. 원래 세계의 패션 주기는 1년에 2바퀴를 돈다. 봄에 그 해 가을/겨울 패션을 예측하고, 가을에는 그 다음 해 봄/여름 유행을 알아 맞춘다. 디자인이 한번 정해지면 해당 시즌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물량 조절뿐이다. 이들이 느긋하게 움직이는 동안 SPA 브랜드들은 쾌속정을 타고 날아다닌다.

H&M
본사에서 디자인을 시작해 한국 고객의 손에 들어오기 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으면 2주, 길어야 9주다. 신상품이 거의 매일 매장에 입고되기 때문에 하루 걸러 한번씩 방문해도 처음 보는 옷들이 있다.

빠른 회전으로 인한 재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 디자인 당 4~8점씩만 들여온다. 2주 후면 이들은 팔려나가고 매장은 완전히 다른 옷들로 채워진다. 물론 이런 가공할 만한 속도는 한 회사에서 모든 공정을 관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두 번째는 트렌디함이다. 가장 최신의 유행은 SPA 브랜드가 속도를 내는 이유이자 결과다. 기존의 브랜드들이 디자인의 70% 가량을 미리 확정하는 모험을 감수하는 사이 SPA 브랜드는 큰 틀 - 색과 소재, 실루엣이라는 몇 가지 요소들만 정해놓고 시즌 내내 이들을 탄력적으로 변동해 나간다.

4대 컬렉션, 길거리 패션, 특정 국가의 특정 매장에서 일어나는 고객들의 실시간 반응에 민감하게 대응해 예의 그 빠른 속도를 활용, 최신 유행하는 옷들을 끊임없이 매장에 투입하는 것이다. 시즌 중 기획팀과 디자인 팀이 풀 가동되는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은 저렴한 가격이다. 중간 단계가 없는 제조직매형 시스템은 유통 마진의 존재를 없애 싼 가격에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가능케 했다. 100% 캐시미어로 만들어진 스웨터와 카디건을 10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손에 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간혹 칼 라거펠트나 질 샌더와 협업이라도 할 경우 유명 디자이너들의 검증을 받은 셔츠를 단돈 4만9900원에 살 수 있게 됐다.

와 스칼렛 요한슨이 디자인한 아이티 백
이런 연유로 SPA브랜드는 그 원래 뜻에 더해 '다국적 패션 기업이, 거대한 매장 안에, 싸고 트렌디한 옷들을,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빠르게 회전시키는 브랜드'라는 복잡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물론 모든 SPA가 동일한 콘셉트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지금 SPA로 분류되는 브랜드들은 위 특징들의 함량을 조금씩 달리하며 그들만의 경쟁력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사용법 2: 알맹이를 꺼낸다

올 봄 트렌드인 데님에 대응하는 자세를 보면 각 SPA 브랜드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일단 세계 6위의 패션 브랜드이자 일본인들의 국민복으로 불리는 는 셔츠나 트레이닝 바지 등 기본 아이템 위주지만 보기 보다는 트렌드 대응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올 초 일찌감치 데님 라인 'UJ'를 론칭해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섰다.

매장에는 이제 슬슬 지고 있는 스키니 테이퍼드(발목까지 완전히 달라 붙는) 핏부터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보이 프렌드(남자 친구 옷처럼 헐렁한) 핏까지 6개의 라인을 갖춰 놨고, 옆에는 데님으로 만든 원피스가, 건너편에는 데님 재킷이 염료의 진하기 별로 분류돼 차곡차곡 걸려 있다.

데님 왕국을 건립해도 좋을 만큼 다양함에 있어서는 더 얘기할 것이 없지만 베이식 캐주얼을 지향하므로 패션성을 기대하면 안 된다. 기본 셔츠 원피스에서 소재만 데님으로 바꾼 원피스는 '트렌드의 표면적 수용'까지가 가 지향하는 바임을 알려준다.

매장
그러나 청바지 하나에 3만9900원이라는 가격은 여전히 유혹적이다. 발열 기능이 있는 히트텍과 물빨래가 가능한 워셔블 니트 등 늘 새로운 기능성 소재를 선보이는 것도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만의 전략이다.

반면 바로 옆 스페인 브랜드 에서는 같은 SPA라도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가 데님의 모든 핏과 모든 색을 들여 놓는 것으로 트렌드를 소화했다면 는 자기네만의 디자인적 해석을 거친 데님 아이템을 선보인다.

허리에 셔링을 넣은 얇은 데님 셔츠와 민소매형, 재킷형, 파자마형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 데님 원피스를 보면 가 이번 시즌 데님의 어떤 매력에 꽂혔고 또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고 싶어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는 SPA 브랜드 중에서도 특히 디자인 당 물량이 적은 편으로 매장당 2~3점 가량만 들어오는데, 독특한 디자인에 희소성을 더해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의 애를 닳게 만들고 있다. 유행을 유니크하고 깊이 있게 즐기기에는 가장 적합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데님 팬츠는 6만9000원, 셔츠는 8만9000원, 재킷은 13만9000원이니, SPA의 특징인 저렴한 가격이 에 있어서는 '디자이너 브랜드에 비해서'라는 전제가 붙는 듯하다. SPA 중 유일한 여성 전문 브랜드였지만 2008년 남성복 론칭 이후 올해 2월부터 명동 눈스퀘어 매장에 처음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망고
SPA라는 단어의 발원지인 갭은 정작 SPA의 상징인 트렌디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워낙 미국인들의 일상복이다 보니 질 좋은 스웨터와 카고 바지, 후드 티셔츠, 카디건, 편안한 스트레치 팬츠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다. 물론 청바지도 그 중 하나로 다양한 핏과 워싱을 구비하고 있지만 유행을 따랐다기 보다는 늘 해오던 것을 반복한 것이다.

폴로에서 캐릭터를 빼고 아이템만 남겨 대중화한 갭은 국내에서는 가격이 높게 책정돼(데님 팬츠가 9만9000원대) 싸고 베이식한 SPA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다소 경쟁력을 잃은 상태다. 지금 갭에 있어서 SPA란 거의 시스템에만 한정되는 말로, SPA 브랜드의 트렌디함에 주목하는 이들 중에서는 갭을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스페인 브랜드 자라 역시 도입 당시 갭처럼 가격을 높여서 들어 왔지만 세련되게 마감한 인테리어와 어둑어둑한 내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무장한 직원들로 하이패션 매장이라는 느낌을 줘 저항을 줄였다. 적어도 지금 한국에서 '자라를 입었다'라는 말에서 싸구려라는 느낌을 받는 사람은 없다.

SPA의 요건 중 핵심인 속도 면에서 자라는 동종 브랜드들 중 독보적이다. 그들의 JIT(Just In Time) 프로세스는 소비자의 요구와 수요에 따른 패션을 실천한다는 목표로 고객이 원하는 옷을 그들의 손에 쥐어주기까지 2주를 넘기지 않는다. 트렌드에 대한 수용성뿐 아니라 해석력도 뛰어나 유행 아이템을 연관성 없이 마구잡이로 남발하지도 않는다.

매장에는 데님은 물론이고 그 데님이 포함된 더 큰 유행인 로맨틱 컨츄리 무드를 연출할 수 있게 다른 옷들 – 하늘하늘한 꽃무늬 블라우스나 베이지색 가죽 허리띠 등을 같이 판매하고 있다. 이 밖에도 넓게 퍼지는 짧은 플레어 스커트와 보이 프렌드 핏의 모든 아이템, 마린 룩, 남색, 베이지색 등 올해 봄 트렌드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

매장
유니크함은 에 비해 살짝 낮춘 대신 다양성을 높여, 트렌디한 옷뿐 아니라 기본 스타일의 옷, 모자, 가방, 지갑, 남성복, 아동복까지 빵빵하게 갖춰 놓았다. 데님 팬츠가 6만9000원, 재킷이 11만9000원 선으로, 괘씸하게도 국내에서만 높은 가격을 받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람에게 만족스러운 공업형 SPA 브랜드다.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스웨덴 브랜드 은 자라보다 한 단계 낮은 가격으로 '유행을 싸게 즐긴다'는 기본 원칙에 충실하다. 새로 취임한 CEO 칼 요한 페르손이 직접 데님 열풍을 예고한 만큼 이번 봄/여름 상품으로 데님 블라우스와 데님 재킷, 데님 팬츠를 잔뜩 준비하고 있다.

이 트렌드를 풀어내는 방식은 자라나 처럼 속도에 잔뜩 민감한 브랜드들과 달리, 현지 반응에 따라 리오더를 진행하는 일은 거의 없다. 데님이라는 키워드는 100여명으로 구성된 의 디자이너 그룹에서 예측한 것으로, 데님을 선보이되 각 나라의 유행 특성보다는 소속 디자이너들의 감성을 많이 반영하는 편이다.

티셔츠 1만9000원, 재킷 7만9000원대로 가격이 저렴한 대신 완성도가 살짝 떨어지기 때문에 아우터보다는 안에 받쳐 입는 이너웨어나 캐주얼한 원피스 등이 경쟁력이 있다. 남, 여, 아동복은 물론이고 속옷, 머리끈, 우산에 이르기까지 잡화류가 대단히 다양하게 구비돼 있으며, 특히 남성복은 클래식부터 캐주얼, 스포츠까지 제품 구성의 폭이 넓고 동양인 체형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아 이용해 볼만 하다.

사용법 3: 뚜껑을 닫는다

유니클로
싸고 유행에 충실한 옷이 처음 보는 희귀품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전통의 저가 시장인 동대문이 있고, 온라인 패션 시장도 뉴욕 신인 디자이너들의 카피캣 제품이 나올 정도로 트렌드 반응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이들과 비교했을 때 SPA가 우위를 점하는 부분은 글로벌 디자인이다.

지금 한국의 유행을 반영하는 옷도 좋지만 가슴 라인이 깊숙이 파이거나 프린트가 현란한 홀터넥 드레스, 호피 무늬 트렌치 코트 같은 옷들은 국내 브랜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대기업 기반의 친절한 반품 시스템(30일 이내에만 가져오면 반품이 가능하다)과 간섭 받지 않고 몇 번이고 입어볼 수 있는 쾌적한 피팅 룸, 깔끔한 가격정찰제는 SPA 브랜드로 몰리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한다.

얼마 전 의 가세로 명동대전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아직은 호기심 반, 군중심리 반으로 줄을 서는 사람이 많기는 해도 SPA는 당분간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에게 유행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혹자는 SPA를 두고 패션 민주주의라는 단어로 칭송하고, 또 다른 이는 전 세계인의 취향이 동일해진다는 점을 들어 패션 전체주의라는 단어로 비하한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다품종 소량생산을 택한 SPA 브랜드들은 '역 희소성'이라는 또 하나의 가치를 만들어냈다. 가격이 비싸서 희소성이 있는 게 아니라 물량이 적어서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SPA 열풍을 감지하고 동일한 콘셉트의 브랜드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랜드가 제일 먼저 스파오로 스타트를 끊었지만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를 너무 전면에 내세우는 바람에 10대 중심의 캐주얼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강해지고 말았다. 거대 기업의 자본이 필요한 시스템인 만큼 국내에서 이를 시도할 수 있는 회사는 몇 안 된다. 그러나 이미 이랜드에서 스파오에 이은 2호 브랜드 미쏘를 론칭한 만큼 앞으로 SPA에 대한 열광적 구애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자라 매장
취급상의 주의사항

가장 먼저 필요한 자세는 퀄리티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것이다. SPA 브랜드가 꼭 한 두 시즌만 입고 버려야 할 정도로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본 스타일의 옷들은 본인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7~8년도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조 단가를 낮추다 보니 단추나 재봉 마무리 등 세심한 부분에서 실수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쇼핑 시 반드시 디테일을 꼼꼼하게 살펴볼 것. 그리고 그 시즌에 가장 유행하는 프린트, 예를 들면 스트라이프나 호피 무늬가 들어간 제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하는 것도 현명하다.

유명 디자이너들과의 콜래보레이션은 SPA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 중 하나다. 이들은 글로벌 기업답게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척척 섭외해 소비자들에게 깜짝 선물을 안겨주곤 한다. 소니아 리키엘과 협업해 니트 라인을 출시한 은 며칠 만에 상품을 다 팔아 치웠고, 지난 해 질 샌더와 합작해 제이 플러스 라인을 론칭한 는 개시 당일 6억 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국내와는 다른 사이즈 체계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국내에는 55, 66, 77로 사이즈가 보통 3가지로 분류되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36, 38, 40 등 총 6개의 사이즈로 나뉜다. 본격적인 쇼핑을 즐기기 전 편안한 피팅 룸을 이용해 여러 번 옷을 입어보고 자기에게 꼭 맞는 사이즈를 찾아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세일 기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SPA 브랜드들은 연중 2번 (보통 6월과 12월) 재고 소진을 위한 세일을 실시하는데 어차피 다음 해까지 안고 갈 수 없는 옷들이니 화끈하게 가격을 내려 처분해 버린다. 50%에서 많게는 90%까지 세일을 하는 곳도 있으니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기다렸다가 이 시기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도움말: 배정현 쇼핑 칼럼니스트 및 나일론 편집장
패션 블로거 엘리 (http://blog.naver.com/joohyeon94)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