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갤러리] 문봉선 개인전 <청산유수>

'大地', 2009
소나무나 식물기름을 아궁이나 가마에서 태운다. 굴뚝에 괸 그을음을 모은다.

그 파슬파슬한 흔적을 체에 고르게 내린 후 아교풀을 섞는다. 주무르고 다진다. 더할 나위 없는 덩어리가 되면 나무틀에 넣어 누른다.

한때 허공으로 흩어지려던 것들이 다시 세계에 붙들리는 순간이다. 그렇게 얻은 단정한 모양을 재 속에 묻어둔다. 물기가 빠지고 단단해진다. 먹이다.

이처럼 자연의 순환을 다 품었기에, 먹으로 그린 그림에 다른 치장은 필요하지 않다. 재료의 속성을 이해하는 화가는 한 획으로 세계를 펼쳐 놓는다. 수묵화는 먹을 살리는 일이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 한없는 검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수묵화가 문봉선의 그림을 보면, 먹이 만들어진 과정이 궁금해진다. 재료와 혼연한 까닭이다. 어떤 것은 지평선이고 어떤 것은 흐르는 물이며 어떤 것은 안개이나, 가리키는 것보다는 그 유구한 성정이 중요하다. 먹 없이는 붙들 수 없는 풍경이다.

'大地 (綠陰)', 2009
문봉선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말한다. "지난해 늦은 가을,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중학교 시절 매일 아침저녁으로 걸어서 등교했던 옛 길을 따라 아이처럼 천천히 걸어보았다.

산중턱에 걸린 하얀 구름, 옹기종기 솟은 오름, 짙다 못해 검은 솔 숲, 현무암 돌담과 삼나무 방풍림, 이제 막 돌담 어귀에서 싹이 트기 시작한 초록 수선, 태풍과 해풍이 다듬어 놓은 팽나무 고목, 그 위를 앉거나 날고 있는 검은 까마귀 떼, 잘 익은 황금빛 귤, 비양도 위로 펼쳐진 저녁 놀, 가없이 푸른 수평의 선,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었던 3km 남짓한 중산간 언덕길은 옛 색조와 형태 그대로였다.

그러나 다정했던 옛 길은 이미 딱딱한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고, 굽었던 길은 곧게 펴져 있었으며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들만이 세월의 흐름을 상기시켜 주었다."

웬 딴소린가. 그러나 정곡이다. 먹이 제 연원을 품듯, 이 화가도 삶을 살뜰히 품었단 뜻이다. 먹과 화가가 덩달아 긋는 획마다 저 옛 길과 마음이 깃들었단 뜻이다.

그러니 "먹은 먹이다"라는 화가의 신조는 먹과의 길고도 다정한 인연을 이르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엔 붓을 놀리는 순간보다 한지 앞에서 텅 빈 공간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이 화가는 올해 지천명(知天命)이다.

'霧 4', 2010
문봉선 개인전 <청산유수>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있는 금호미술관에서 열린다. 02-720-5114.


'瀟灑園(소쇄원)', 2009
'流水', 2010
'大地(한강)', 2007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