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시를 읽으십니까] 20년간 시장 1/3로 축소… 1만 부 팔면 스타 시인 대접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그 시대의 화두를 알 수 있다. 성공에 대한 욕망부터 인간에 대한 통찰까지 다양한 '시대적 요구'가 팔리는 책 속에 담겨 있다.

베스트셀러 목록만 본다면, 지난 20년 동안 한국사회는 시의 시대에서 자기계발의 시대로 넘어왔다.

80년대는 단연 시의 시대였다. 1987년 베스트셀러 순위 1위는 서정윤의 <홀로서기>, 2위는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었고, 이해인 수녀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두레박>과 김옥진의 <산골소녀 옥진이>,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 등 시집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서정윤의 <홀로서기>는 1년 만에 시집 최초로 100만부 판매를 돌파했고 이후 4편까지 출간되면서 모두 300만부 가량 판매됐다. <접시꽃 당신>도 100만 부 이상 팔렸다. 1988년 역시 1위부터 3위를 시집이 석권했다. 서정윤의 <홀로서기>, 에리히 캐스트너의 <마주보기>,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다.

지난 해 베스트셀러 상위 10위는 모두 소설과 자기계발서가 차지했다. 1위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2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3위는 린다 피콘의 <365 매일 읽는 긍정의 한줄>이다. 5위는 고경호의 <4개의 통장>, 6위는 빅뱅의 <세상에 너를 소리쳐>이며 7위는 <해커스토익>이 차지하고 있다.(이상 교보문고 집계 기준)

시대가 바뀌며 주목받은 시인도 바뀌었다. 80년대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도종환, 서정윤, 유안진 시인
100만 부씩 팔리던 시집 시장은 어떻게 됐을까? 지난 해 시집 베스트셀러인 창비시선 300번 기념시선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는 3만 5000부를 발행했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판매량의 3.5% 미만인 셈.

사실 지난해 발행한 국내 모든 시집을 통틀어도 <엄마를 부탁해>의 판매량에도 못 미친다. 일주일에 10권만 꾸준히 팔려도 시집 분야 베스트셀러에 들어간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실제로 일주일에 10권씩, 52주를 팔면 5200권이 팔리는 셈이니 그 정도면 상위 베스트 10에는 들 수 있다. 1만 부를 팔면 스타 시인으로 대접받는 시대다. 한마디로 이제 시단은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그 많던 시집은 어디로 갔을까!

달라진 독자, 무너진 시장

독자와 낭송회 갖는 시인들. 사진/연희문학창작촌
20년의 세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대한출판문화협회에 시집 발행 편수와 부수에 관한 데이터를 의뢰했다. 전산화 작업이 시작된 1989년과 1990년 2년 동안 국내 발행된 시집은 각각 670종과 757종, 부수로는 91만 9820권, 98만 2250권이 발행됐다.

2009년에는 1045종, 107만 5170권이 발행됐다. 수치만 봐서는 시집 발행이 더 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발행 편수가 두 배가량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권당 판매 부수는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인터넷 서점 예스 24의 판매량 분석 결과를 보면 최근 5년간 시집 판매 비율은 전체 문학분야의 2.7%-5% 선에 머물고 있다.

'본격문학'이라 불리는 순수문학 시장에서 체감은 더 심각하다. 출판사 창비 김정혜 부장은 과거 80~90년대와 비교해 최근 시집 시장의 체감 비율을 "1/3 내외 축소"라고 답했다. 일례로 1995년 '창비시선' 신간의 연평균 제작부수 7000부 내외였지만 2010년 현재 3000~5000부 내외라는 것.

지난 해 창비시선의 베스트 5위는 300번 기념시선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와 김기택 시집 <껌>, 나희덕 시집 <야생사과>, 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안현미 시집 <이별의 재구성>인데 각각 3만 5000부에서 7000부 사이를 발행했다.

1978년부터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발간하고 있는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역시 마찬가지라는 입장이다. 문학과지성사 이근혜 과장은 "시집 초판을 예로 들면 80년대에는 신인의 경우에도 3000부 이상이 대부분이었고 기성 시인의 경우 5000부 인쇄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이 90년대에는 3000부, 2000년을 넘어서면서 2000부로 줄어들었고 최근 신인의 경우 초판 1500 부를 고려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김기택, 나희덕, 안도현 시인
최근 가장 잘 나갔다던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가 2만 5000부를 판매했다. 시집 한 권이 100만부, 200만부를 돌파하던 시대는 이제 전설처럼 들린다.

왜 줄었을까?

사람들은 왜 이제 시를 읽지 않는 걸까?

문학과지성사 이근혜 과장은 "현대사회의 복잡하고 상대적인 현상과 가치들은 그것을 해석하기 위한 명석한 관찰자의 산문적 통찰을 요구하고 있다. 시 독자가 줄었다면 그런 사회적 요구나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1세기, 독자들은 정보용 읽을거리를 찾고 감정순화 방식도 스토리텔링의 형식을 원한다. 잘 읽히는 글이 잘 팔리는 시대에 시인들의 언어는 더 압축되고 내면화됐다. 시를 읽기 위해서는 시인의 '멘탈'과 교감하는 수고를 거쳐야 하지만, 이를 견뎌낼 인내력 있는 독자는 많지 않다.

2000년대 주목받은 진은영, 김행숙, 황병승 시인
창비 김정혜 부장은 "쏟아지는 정보 속에 독자의 이해수준은 '평면화'되는 반면 고도의 상상력과 농축을 요하는 시의 언어는 더욱 '내면화'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스 24 문학담당 이지영 과장 역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어려운 내용도 쉽게 풀어 쓴 책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시장 상황에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해설도 없는 시집을 찾아 읽으려는 독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사회가 산업화, 정보화될수록 시가 대중과 유리될 것이라는 말은 이미 예전부터 있어왔던 말이다.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 씨는 1976년 <산업화시대의 시>에서, 산업사회가 난숙기에 접어들면 시를 안 찾을 것이라는, '죽은 시(詩)의 사회'의 도래를 예견한 바 있다.

시 독자의 감소가 '시대적 현상'라는 해석의 한 편으로 이를 '한국적 특수성'으로 풀이하는 목소리도 있다. 실천문학사 손택수 주간은 "국내 시집 시장의 절대 다수는 386세대였는데, 이들의 시적 감수성이 최근 젊은 문단의 감수성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386세대는 대학시절 사회운동 한 편으로 문학을 통해 감성을 분출한 세대이자 80~90년대 시집 시장을 떠받친 독자층이다. 이들이 80년대 시집 구매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지만, 최근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들은 이들의 감수성과 전혀 다른 시집을 내기 때문에 2000년대 들어 독자층이 떨어져 나갔다는 설명이다.

실제 예스 24가 집계한 지난 해 시집 구매자 현황을 보면 386세대로 꼽히는 30~40대 남성 독자 비율이 24%에 이른다. 교보문고의 지난 해 집계에서도 30-50대 남성 독자 비율 역시 21.6%에 이른다. '많이 이탈해서' 이 정도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출판계에서는 이탈 시점을 1997년 외환위기 전후로 보고 있다. 경제여파로 시집 시장이 대폭 감소하는 시점이자 한국문학이 개인화되는 시점이다. 최근 문학계에서 회자되는 '젊은 시인'이 등단한 시기는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부터 2005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386세대가 선호하는 시인들의 시집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80년대 문학계의 아이콘이었던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사후 20년이 지난 작년에만 1만 1000부가 팔렸다.

다시 말하지만 1만 부를 팔면 스타 시인이 되는 시대다. 창비가 밝힌 2000년 이후 베스트셀러 10위의 저자는 김남주, 김용택, 신현림, 정호승, 안도현, 최영미, 도종환 등으로 모두 중견 원로 시인들의 시집이다. 문학과지성사가 밝힌 시집 분야 베스트셀러 저자 역시 기형도, 황지우, 이성복, 황동규, 최승자 등 모두 중견 원로 시인이다.

문학계 '핫 아이템'은 시집

계몽적인 기사라고 여기서 덮어두려 했다면 다시 집중하자. 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난 20년 동안 시집 시장은 1/3로 축소됐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문학계 내부에서 시 담론은 더 활성화됐다. 시장은 사라지고 전문가는 늘어나는 반비례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

이 반비례적 현상은 또한 최근의 시가 '알아듣기 어려운' 난해함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또한 아이러니다. 2000년대 문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인들의 작품은 '전문가'의 해설을 거치지 않고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함을 자랑한다. 이 난해함이 독자와의 소통을 멀게 하고, 시장을 축소시킨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어 왔다.

왜 요즘 시인들의 시가 그렇게 어렵냐는 질문에 대해 문학평론가 조강석 씨는 "이창호, 이세돌에게 쉬운 바둑 두라고 할 수 있냐?"고 되물었다. 이창호, 이세돌에게 '쉬운 바둑, 이기는 바둑' 두기를 요구할 게 아니라, 그 한 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설명하고 그리하여 온 국민의 바둑 보는 안목과 나아가 한국 바둑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바둑 해설자의 몫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시인이 시를 어렵게 쓰는 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달라진 시 경향을 충실히 해석하고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출판계와 전문가의 몫이라는 비유다.

실제 문예지의 편집위원, 문학평론가들이 마련하는 특집과 작가론은 문학계 담론을 형성하는 바로미터로 작용한다. 이 담론의 대세가 최근 '소설'에서 '시'로 넘어왔다.

2000년대 등단해 2005년을 전후로 첫 시집을 발표한 김경주, 김민정, 황병승 등이 보여준 '새로운 감각'은 이후 '미래파'란 이름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미래파 논쟁과 그를 둘러싼 전위적인 시 세계를 펼치는 시인들이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문학계 전면에 나섰고 그들을 지지하는 젊은 비평가 그룹이 담론의 중심에 있다. 이후 5년이 흘렀고 지난 해부터 올해까지 그들의 두세 번째 시집이 주요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텍스트 해석 불가' 논란을 넘어 하나의 시류가 된 것이다.

지난 1,2년 간 지식인 계층에서 화두가 된 '문학의 정치성'은 소설보다 시, 정확하게 시인을 중심으로 담론이 형성됐다. 노동시나 참여시 계열의 문인 아니라 진은영, 심보선, 서동욱, 김행숙 등 특유의 언어미학을 구축한 시인들을 중심으로 담론이 논의됐다는 점도 특징이다.

출판 시장과 별개로 문학계에서 시 담론이 주목을 받는 이유에 대해 문학과지성사 이근혜 과장은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세대가 발표한 작품과 문학담론은 80~90년대의 첨예한 이념(참여 문학이냐 아니냐) 논쟁에서 자유로워진 혹은 그러한 논쟁과는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세대가 창작하고 역시 문학평론을 하고 있다. 미래파 논쟁이 그러하고, 최근 '시와 정치: 시의 현실 참여와 정치성의 문제 제기' 역시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시단의 맹주가 없는 시대이기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다양하고 다채로운 담론이 활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처럼 되뇌는 출처가 불분명한 '시에 대한 위기감'이 이를 촉발했을 수도 있고요. 시라는 장르의 생래적 속성이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 물리적인 팽창과 축소의 논리에서 자유로운 탓도 있을 겁니다."

시 독자가 사라진 시대, 오히려 시 담론이 활성화되는 문학계에 대한 한 전문가의 의견이다. 이 아이러니한 현상이 왜 일어나게 됐을까? 바뀐 '젊은 시'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면 지금 당장 서점의 시 코너에 가보자. 21세기 새로운 형식의 세헤라자드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시집 계약은 입도선매
시집 시장의 축소와는 별개로 최근 문학동네, 문예중앙 등 문학전문 출판사가 시선집을 출간을 기획하면서 출판사들마다 경쟁적으로 시집을 계약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올 봄 '문학동네 시인선'을 내놓는다.

4월 중 '시인선'의 이름을 단 첫 시집이 출간되는데 최승호, 허수경, 송재학, 김언희, 이문재, 박상순 등 중진과 이은규, 김이강, 임현정 등 신인을 비롯 올해 20-30권 정도의 시집 출간을 준비 중에 있다. 계약 여부가 확정된 시인은 근 50명에 달한다.

문학동네 편집부 김민정 팀장은 "문학동네는 1990년대 한국소설 붐과 함께한 출판사이기 때문에 시보다 소설에 집중했다. 대표가 시인 출신으로 시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각별한데도 후발주자로 시집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동안 많은 시집을 출간했지만 여러 차례 시집 콘셉트와 표지가 바뀌면서 문학 독자들에게 확실한 각인을 주지는 못했다"고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출판사 문예중앙도 문예지 <문예중앙>을 올 가을에 복간하면서 절판된 '문예중앙 시선집'을 복간할 계획이다. 문예중앙은 2005년 첫 시집을 시작으로 44권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다.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를 일컫는 '미래파'담론의 중심에 섰던 것도 이 문예지다. 재작년 무기한 휴간되며 시집 역시 절판됐지만, 올해 중앙일보가 이를 인수하며 다시 복간을 서두르고 있다.

<문예중앙> 편집위원인 조강석 문학평론가는 "절판된 일부 시집은 재고가 없을 정도로 시 독자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시집이다. 문예중앙 이름으로 시집을 냈던 시인들에 대해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복간 배경을 설명했다. 문예중앙은 기존 시인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와 시인을 발굴한다는 계획이다.

조 평론가는 "소설과 시는 상황이 다르다. 시집은 최대한 많이 팔린다고 해도 문예지가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 문학계 전체 균형을 맞추는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기존 출판사들 역시 25권에서 35권까지 시집 출간을 확정한 상태다. 1년에서 1년 반 이상 출간 스케줄이 정해져 있는 셈이다.

몇몇 출판사가 새로 시집 시리즈를 출간하면서, 최근 문학전문 출판사들 사이에는 등단 1~2년 차, 10여 편의 시를 발표한 신인들도 입도선매하듯 시집을 계약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지난 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한 시인은 등단 후 10개월여 만에 문학출판사와 시집 계약을 했다. 시인은 "나뿐만 아니라 등단 후 1,2년 이내 시집 계약을 맺는 추세다.

몇몇 시집 시리즈가 나오면서 출판사 마다 시집 계약에 경쟁이 붙은 것 같다. 주요 시인들은 몇 권씩 계약이 된 터라 신인들까지 시집 계약 시기가 빨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