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발상의 미학] 뮤지컬·드라마·광고 등 발상의 전환 통해 문화적 다양성·참신함 창출

KBS <추노>
'다 그래!를 뒤집어라'는 광고 카피가 있다.

KT의 광고처럼 뻔한 생각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 즉 '역발상(逆發想)'의 철학이 기업경영을 뛰어넘어 문화 속에서도 녹아들고 있다.

뻔한 상상, 클리셰(cliché, 진부)한 표현들은 대중에게 피곤함만 안겨줄 뿐 더이상 매력적인 코드가 아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도 "발명을 하려면 풍부한 상상력 외에 온갖 잡동사니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참신한 역발상의 미학이 건네주는 문화 속 짜릿한 상상력을 들여다봤다.

왜 역발상인가?

삼성 지펠 CF
최근 프랑스 패션매거진 <엘르>가 최신호 표지모델로 마른 모델이 아닌 몸집이 큰 모델을 기용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해 화제가 됐다. 이 같은 시도는 패션을 선도하는 프랑스에서 상당한 모험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현대 여성 중 깡마른 모델 체형보다는 통통한 66~77사이즈의 여성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실성 있는 접근으로 보인다. 패션매거진 스스로 '역발상'을 통해 현실에 더 다가가려는 목적이라고 봐도 무관하지 않을까.

역발상, 즉 상식을 벗어난 새로운 패러다임은 비즈니스 마인드에서 나온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을 통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결실까지 맺는 관계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경영학 교수인 로버트 서튼가 쓴 <역발상의 법칙>을 보면 과거 방식과 새로운 방식(역발상)이 주는 차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과거 방식의 재활용(반복적 업무의 구성 원칙)'을 보면 '다양성을 몰아낸다', '낡은 것을 낡은 방식으로 본다', '과거를 답습한다' 등의 결과를 야기한다.

'새로운 방식의 탐험(혁신적 업무의 구성 원칙)'에서는 '다양성을 권장한다', '낡은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본다', '과거에서 벗어난다' 등을 통해 역발상의 필요성을 짚어준다.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
이 논리는 문화 속에서 그대도 적용된다. 진부한 구성은 문화적으로 매력적인 코드를 창출하지 못하고, 역발상적인 사고는 창의력으로 재포장돼 다양성과 참신함을 내포하며 대중에게 어필한다. 책은 "혁신의 열쇠는 역발상이다"라고 결론지으며, 현 사회에서 역발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공연예술, '역발상'으로 대중성 확보하다

순수예술인 발레가 '댄스뮤지컬' 장르로 재탄생한 것만으로 관객에게 흥미를 유발한다. 그 중에서도 지난 1995년 초연 이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롱런 중이며, 올해 네 번째로 국내 무대에 올려지는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는 역발상의 코드를 그대로 이어간다.

안무가 매튜 본은 발레의 고전인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발레리나가 주인공이 아닌 남자 무용수들로 무대를 연출한 기이한 역발상으로 전 세계 관객에게 주목을 받았다. 내용 속 주인공도 공주가 아닌 왕자다.

배경을 영국 왕실로 옮겨와 사랑을 갈구하는 유약한 왕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기존 <백조의 호수> 속 섬세하고 가녀린 여성 백조 대신 깃털 바지에 근육질 상체를 드러내고 백조로 변신한 남자 무용수들의 관능적이고 역동적인 군무는 강한 힘을 발산한다.

뮤지컬 <자나, 돈트!>
신비로운 호수와 화려한 왕실 무도회, 런던 뒷골목의 자유분방한 바(bar) 등 환상과 현실 속 공간들이 무대에 올려져 고전 <백조의 호수>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댄스뮤지컬로 다시 태어난 <백조의 호수>가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연명할 수 있는 이유는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성공 사례다.

뮤지컬계는 일찌감치 역발상을 통해 관객에게 참신한 공연을 전개 중이다. '이순신 장군의 3일 행적은 어땠을까?'라는 짧은 궁금증으로 출발한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는 신선한 역발상이 관객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이 3일간 일본 무사에게 끌려다녔을 것이라는 발칙한 상상은 영웅을 코믹한 캐릭터로 재해석했다. '난중일기' 속의 엄숙하고 진지한 이순신 장군은 사라지고, 사스케와 동고동락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은 이순신 장군을 친근한 이미지로 탈바꿈시켰다.

뮤지컬 <자나 돈트>는 미국의 하츠빌(Hartsville)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동성애자들이 '정상'이고 이성애자들이 '성적소수자'라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극중에서는 '이성애자들도 군대에 가야 하나', '이성애를 인정해 달라', '동성애자가 아니면 추방한다' 등 기존의 생각들을 뛰어넘는 소재로 뮤지컬을 꾸며 역발상의 묘미를 안겨주었다.

올초 뮤지컬 <콘택트>도 역발상의 사고로서 '뮤지컬에 노래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했다. <콘택트>는 제한적인 대사와 음악, 춤만으로 꾸며진 뮤지컬이다. 세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스토리를 대부분 춤이 대체하며 객석을 매료시켰다.

KBS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공연기획자 이기현 씨는 "획기적인 공연을 위한 '역발상' 전략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변모해 관객들에게 흥미를 유발한다"며 "이런 공연들은 대중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소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는 메시지를 발상의 전환을 통해 더 대중적으로 쉽게 어필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광고계, 역발상의 트렌드를 이끌다

"생각을 뒤집어라!"라는 구호는 최근 TV만 틀면 자주 들려오는 문구다. 이 CF의 한 장면처럼 광고계는 이미 역발상의 근원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트렌드에 민감한 광고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상의 전환이 이뤄진 지 오래다.

불과 3~4년 사이에 주류 시장은 여성 모델들이 자리를 꿰찼다. 주류 모델로 발탁된 여자 연예인은 뜬다는 속설까지 나돌 정도다. 이효리, 유이, 이민정 등 여자 연예인들이 소주업계의 얼굴로 대변된 건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최근 주류업체 국순당도 '생막걸리'를 출시, 막걸리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바꿔줄 여자 모델로 황정음을 발탁했다. 국순당 측은 "막걸리와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역발상적 이미지로 모델을 선별했다.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요즘 트렌드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필요했다"고 밝혔다.

MBC 드라마 <동이>
간장과 조미료 등 주부들의 식품 광고도 젊은 남자 모델들로 대체돼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청정원은 장동건, 정우성, 이승기 등을 차례로 기용해 주부들에게 어필했으며, 샘표식품도 이선균을 내세워 2년 여간 제품의 얼굴로 낙점했다.

30~40대 주부들을 위한 가전 제품 시장도 마찬가지다. '삼성지펠 마시모주끼' CF 속에서 이승기는 "아이 러브 유"를 속삭이며, 실제 연인을 만난 듯 따뜻한 눈빛과 손짓으로 냉장고를 대한다.

삼성전자 마케팅팀 김용남 차장은 "타깃과 반대되는 성의 모델 발탁은 일종의 '발상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기존에는 여성 소비자들의 워너비 상대를 모델로 채용해 광고 효과를 기대했다면, 이번에는 여성들의 심리를 건드려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남자 모델을 발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여성 소비자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남자 모델이 소개하는 제품에 더 큰 호감을 갖게 된다. 예전에는 '저 여자 모델이 쓰는 제품을 나도 쓰고 저 여자 모델처럼 되고 싶어'라고 했다면, 지금은 '저 남자 모델이 소개하는 제품이라면 꼭 갖고 싶다'는 여성의 심리를 자극한 셈이다"고 설명했다.

결국 발상의 전환이 광고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트렌드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들의 뷰티 제품에 배용준, 비, 김현중 등 남자들이 얼굴로 나서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김용남 차장은 "광고 트렌드는 급속하게 바뀌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질지는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 더욱 다양해진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이러한 역발상을 시도한 광고 트렌드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또 광고 모델도 기존의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고, 제품과 함께 광고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 변신하는 모습이 소비자들에게 신선하게 어필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방송계, 역발상으로 다양화 꾀하다

KBS 드라마 <추노>는 역발상의 대표적인 드라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과 궁궐 안의 패권다툼이 아닌 노비와 그들을 쫓는 추노꾼들에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추노'라는 생소한 인물들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노비들의 삶은 참신한 소재로 다가왔다. <추노>의 매력은 고스란히 시청률에도 영향을 미쳐 30%를 넘기는 저력을 과시했다.

"빼앗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드라마를 시작했다." KBS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는 동화 속 신데렐라가 아닌, 그를 괴롭히는 신데렐라 언니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신데렐라 언니의 슬픈 이면은 무엇일까?"라는 역발상이 <신데렐라 언니>를 재창조한 셈이다.

<신데렐라>의 김영조PD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신데렐라와 질펀한 인생을 살고 있는 엄마를 가진 은조(문근영)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빼앗기고 뺏는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세상 풍파 속에서 서로 사랑과 슬픔을 공유하게 된다"고 말했다.

<신데렐라 언니>는 신데렐라 언니의 내면을 그려내면서 여성들의 공감대를 끌어낼 전망이다. 유리 구두의 주인공이 신데렐라가 됐지만, 신데렐라 언니가 그 유리구두를 갖지 못한 이유도 드라마를 통해 재해석된다.

<신데렐라 언니>가 동화 속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면, MBC 드라마 <동이>는 역사 속 실제 인물인 숙빈 최씨를 등장시켰다. <동이>의 이병훈PD 역시 "차기작을 고민하다 장희빈과 숙빈 최씨를 뒤집어 보기로 했다. 늘 주인공이던 장희빈을 조연으로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역발상이 <동이>의 탄생 비화임을 밝혔다.

조선시대 영조의 어머니이기도 한 숙빈 최씨는 역사적 사료에서도 자세한 설명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천민 출신으로서 숙빈의 자리에 올라, 왕의 어머니가 되는 과정이 파란만장해 드라마틱한 요소로 주목받고 있다. 이병훈PD의 역발상을 통해 새로운 캐릭터가 발굴되고, 시청자들에게 참신한 이야기가 제공되는 셈이다.

한 지상파 방송PD는 "역발상이라는 창의적 사고를 통해 드라마의 소재와 캐릭터를 다양화했다는 것이 장점이다. 한편으로는 소재의 고갈이 부른 또 다른 대안이라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