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시를 읽으십니까] 2000년대 주목받는 시인 5人에게 묻다

김언 시인
"왜 시집을 읽지 않느냐"는 질문에 열에 아홉은 "관심이 없어서" 혹은 "그것 말고도 할 게 많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열에 한 명은 이렇게 답한다.

"무슨 말하는지 이해가 안돼요."

실제 2000년대 문학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시인들의 작품은 전문가의 해설을 거치지 않고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하다. 이 난해함이 독자와의 소통을 멀게 하고, 시장을 축소시킨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어 왔다.

2000년대 주목받는 시인 5인에게 물었다. 최근 달라진 시 경향과 독자들에 대해. 이 '달라진 감각'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거냐고. 더불어 물었다. 쓰는 시와 읽는 시의 차이에 대해, 독자로서 당신이 선택한 시집에 대해서.

1. 시의 종언을 말하는 시대, 왜 시를 쓰나?
2. 젊은 시인들의 시가 어렵다고 하는데, 쉽게 쓸 생각 없나?
3. 시 쓰는 노하우 공개, "나는 시의 영감을 여기서 얻는다."
4. 독자로서 시집을 읽을 때 어떤 점에 끌리나?
5. 그래서 찾은 시집의 취향은?
6. 독자에게 말해주세요. "내 시의 관전 포인트는 ***"이라고.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2003), <거인>(2005), <소설을 쓰자>(2009) 출간. 2009년 미당문학상 수상.

1. 이건 아무래도 비유에 기대어 답변을 해야겠다. 공기가 남아 있을 때까지는 숨을 쉰다. 그리고 아직 공기는 남아 있다.
2. 소통은 결국 자기 입장에서의 소통이다. '소통'이란 용어를 써서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문제 삼는 경우가 많은데, 거기서 나오는 소통은 아마도 대부분 일차적인 문맥 파악이 쉽게 되느냐 안 되느냐에만 기대어서 나온 말일 것이다. 과연 일차적인 문맥 파악의 수월성이 시의 소통에서 전부를 차지할 수 있을지, 또 좋은 시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일차적인 문맥 파악의 수월성과 별개로 매력적인 시는 얼마든지 존재하고, 그것이 좋아 시를 읽는 이들도 비록 소수일지라도 분명히 있다. 소수는 독자가 아닌가? 다수의 독자만 독자인가? 소수에 인색한 우리 사회의 풍토가 시단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는 증거가 바로 소통으로 시를 재단하려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일차적인 문맥 파악에만 만족하는 소통이라면 굳이 시를 쓸 필요가 없을 거라는 것. 소설이나 수필 같은 장르에서 기대해야 될 소통의 의미를 시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면, 굳이 시라는 장르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만약 진정으로 더 많은 수의 독자를 원한다면 굳이 시를 쓸 필요가 없다. 소설을 써야지. 아니, 아예 영화판으로 뛰어들든지. 천만 관객을 목표로! 더 많은 독자를 구하는 것, 그것만이 목적이라면 시라는 장르부터 포기하는 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일 거다.
3. 사실상 모든 곳에서 얻는다. 사실상 모든 곳에서 오는 그 순간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시적인 순간은 매일 매 순간 찾아오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중 일부라도 건져낸 것이 가까스로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된다.
4.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를 깨우쳐주는 시. 그전까지는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시적 취향을 발굴해주는 시, 나도 몰랐던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발견하게 해주는 시, 그리하여 내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또 하나 일깨워주는 시를 좋아한다. 그런 시는 언제나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과거의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시는 매번 미지에서 찾아와서 어느 순간 과거가 된다.
5. 그래서(!) 지금도 찾고 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또 다른 시적 취향을 발견하게 해주는 시를.
6. 나의 시에서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것.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 만약 발견했다면 정말로 감사할 일이고, 끝내 못 찾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 세상 모두와 소통할 수 있는 시는 없으니까.

안현미 시인
2001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곰곰>(2006), <이별의 재구성>(2009) 출간. '불편' 동인.

안현미 시인 (사진/조용호)
1. 문학의 종언을 말하는 시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가 더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의 종언 시대가 아니라 인류 최초의 인간이라고 해도 시를 썼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해서 감동하는 것이니까. 인류최초의 인간이라고 해도 감동을 받고 표현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2. 내 시는 다들 쉽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어렵게 쓸 생각 없냐'고 물어보는 게 맞지 않을까?(웃음) 개인적으로 어렵거나 쉽게 쓰자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시인이 살아온 환경이 시에 반영된다면 나를 키운 건 8할이 텔레비전이다. 요즘 세대는 인터넷일 거다. 이런 일상의 언어가 시인의 몸속에 육화되어 발현된다. 내가 '젊은 시인의 대표'는 아니지만, 시를 쓰는 건 순간의 찰나적인 기쁨이나 슬픔을 언어로 그리며 감정이 정화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이런 경험을 한 후 시인들이 '시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고. 최근 젊은 시인의 시들이 예전 형식과 다른 시를 쓰는 건 같은 대상에서도 텔레비전, 인터넷처럼 감흥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예전 세대와 달라서이지 않을까.
3. 스스로 생각할 때 좋은 시가 쓰이는 순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선 상태인 것 같다. 물론 이런 순간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영감이 어디서 오는지는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일상생활에서 가끔 어떤 단어가 튀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럼 그것에 대해서 하루 종일 생각한다. '빨강'이란 단어가 튀어 오르면 계속 빨강을 생각하고 다니는 거다. (영화 티켓, 사진, 메모가 빼곡한 노트를 보여주며) 그런 생각을 평소에 정리해둔다. 그러다 보면 다른 영감과 부딪쳐 시로 표현될 때가 있다.
4.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뭔가를 다 말한 것 같은 느낌의 시를 좋아한다. "도가 무엇인가?" "뜰 앞의 전나무" 같은 선문답의 세계와 짧고 명료한 하이쿠도 매료됐었다. 시가 모든 걸 다 말해주는 건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5. 이성복 시인과 장석남 시인의 담백한 시들.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허수경 시인의 시는 모두 절창이다. 조연호 시인의 시는 '그 시인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서 좋아한다. 퀴어 담론과 B급 정서를 담은 황병승 시인의 시는 내가 전혀 접해보지 못한 소재로 마음을 흔들어주었다.
6. 여백이 많은 시, 진정성이 느껴지는 시, 흉내낼 수 없는 시, 손으로 만져지는 시, 물맛 같은 시. 그러고 보니 내 시라기보다 내가 쓰고 싶어 하는 시에 대한 느낌 같네.(웃음) 지금의 내 시는 '일상과 비일상 사이의 상상'이라고 해두자.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5), <기담>(2008), <시차에 눈을 달랜다>(2009) 출간. 2009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 문학부문상, 제2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 사람들에게 시를 쓰고 있는 동안의 희열이 존재하는 이상 시는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고 시 쓰기가 멈추었던 시대는 없었다.
2. 젊은 시가 쉽고 어려운 문제라고 이분화하는 것보다는 공감의 방식에 대한 차이를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독자들에게도 저마다 공감의 방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듯이 시인들에게도 자신이 생각하는 공감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일테면 나의 경우 공감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책을 읽을 독자를 상상하는 형태의 상상력에서 출발하고 다음으론 잠재적 독자를 고려한다. 즉 지금은 내 책과 만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만날 수 있는 독자에 대한 배려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대중보다는 인간을, 인간보다는 인간의 감정을 배려한다. 그런 의미를 공감하려는 독자들이 저의 책을 읽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3.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설렘은 자신으로부터 늘 낯설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의 언어에 늘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거기에 맞는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으로서 글쓰기는 늘 멀미와 시차를 동반한다. 작가마다 고유의 방식으로 자신의 글을 가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예열에 대한 나의 고유한 방식을 존중하는 것뿐이다. 시인은 영감을 믿는다기보다는 영감을 가꾸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4. 잠들기 전에 읽고 싶은 시의 목록을 정해둔다. (좋아하는 시집을 꼽으라면) 욕조에 들어가서 읽고 싶은 시집들.
5. 최근엔 일본이나 독일 극작가 출신들의 시들을 많이 보는 편이다.
6. 볼 때마다 달라지는 언어의 시차들.


199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2005),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2009) 출간. 제8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1. 처음 시를 읽고 공부하던 때가 1995년이었다. 물론 시단 중심에서는 시의 위기를 운운하던 때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고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데뷔한 것이 1999년이었는데 문학이 내일 당장 사라지고 시가 내일 당장 낯모르는 장르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지진이 나서 온 세상이 초토화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살 집터에 내 집을 지어야 하는 건 내 몫이기 때문에. 더는 지을 필요가 없겠다, 내 스스로 생각이 들면 더는 쓰지 않겠지.
2. 나는 아직도 내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 시집은 너무 긴장감이 풀려버려 아직도 이를 반성하고 있다. 시 읽기는 무엇보다 훈련이 되면 아주 쉬운 장르라고 여긴다. 프랑스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우리에겐 그 어려운 퐁주나 발레리나 등 시인의 시를 줄줄 외는 것을 보라. 일단 집어 읽는 데서부터는 시집은 열리고 또 닫히는 것이 아닐까.
3. 가장 어려운 질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나는 새벽에 방앗간에서 가래떡이 뽑혀 나올 때, 우거지가 팔팔 삶아지고 있을 때, 어떤 느낌 같은 것이 온다. '이게 뭔가' 그 뭔가를 모르면서 요리하고 먹는 행위가 시가 뭔가를 모르면서 쓰고 읽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4. 내가 놓친 순간 같은 것을 그대로 포착해서 한 호흡에 풀어 놓는 시.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가 발끝을 딱 세웠을 때 응집되는 힘과 탄력과 균형과 미 같은 것이 일순 모아지는 그런 시.
5. 시집을 읽을 때는 취향이 없다. 어떤 시집이든 시인이든 내가 읽으면서 접게 되는 시가 꼭 한 편씩은 있다. 일단 신간이 나오면 놓치지 않고 다 보는 편이다.
6. 내 시의 관전 포인트는 만만함이다.


2005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2009) 출간. '인스턴트' 동인.

1. 베르너 헤어조크의 남극을 찍은 다큐멘터리 <세상 끝과의 조우>를 보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바다의 반대편인 산으로 가는 펭귄 한 마리가 나온다. 연구원에 따르면 그런 펭귄은 다시 잡아서 먹이가 많은 무리 속으로 데려다 놓아도 곧 그곳을 이탈해 산으로 가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고. 혼자서 70km나 떨어진 설산을 향해 그것이 죽음을 향한 길인 줄도 모르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펭귄의 뒷모습은 쓸쓸하고 애잔하다. 어쩐지 무언가에 사로잡힌 시인의 모습과 겹쳐진다. 펭귄, 왜 너는 그곳으로 가는 거야?
2. 어느 시인도 시를 어렵게 쓰려고 노력하거나 쉽게 쓰려고 노력해서 쓰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그러한 노력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시가 뭐 엄마 치마 고무줄이야? 이렇게 늘렸다 저렇게 줄였다 하게?' (동혁이형 말투로) 자기 몸에 딱 맞는 사이즈가 있지 않나. 시인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만의 시를 쓴다고 생각한다. (제발 어렵게 쓰지 말라는 말, 젊은 시인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 그만 하시길. 얼마 전에도 처음 뵙는 분이 대뜸 어려운 시가 좋은 줄 아냐고, 젊은 시인들 그렇게 쓰면 안 된다고 그러시더라.) 시가 어렵게 읽힌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과 어려운 것을 혼동하는 것 같다. 시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졌는데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급변하고 있는 사회구조에 대해 우리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동시에 그것을 빠른 속도로 흡수해서 내장하게 된다. 그 안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과 경험, 계기, 언어와 표현방식, 발화의 지점은 각기 다 다르다. 해석하려는 습관이 향유를 방해한다는 것을 왜 모르나. 요즘 젊은 시인들은 교과서로만 공부한 세대가 아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3.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혼자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혼자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 혼자 누군가를 기다릴 때, 혼자 누군가를 기다리며 책에 밑줄을 그을 때, 잠이 안 올 때, 잠 속에서, 음악 듣다가, 대화하는 도중.
4. 진정성이 느껴지는 시집. (진정성이라는 건 설명하기가 참 애매모호한데 읽다 보면 그냥 알게 된다.) 특정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다. 나쁠 때도 마찬가지다.
5. 독서용 시집이 뭔지 잘 모르겠다. 정해진 것이 없다.
6. 내 시의 관전 포인트는 해석하지 말기이다. "설명할 순 없지만 좋더라"는 말이 가장 정직하고 반갑고 怒峠?말이다. 시인이 쓴 의도와 맥락을 맞추는 퀴즈놀이는 더 이상 할 필요 없다.


김경주 시인
김민정 시인
강성은 시인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