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시를 읽으십니까] 미학적 자유 누리며 정치적 바로미터 역할 수행

시대가 흐르며 시인들의 작품, 활동도 다양한 방식으로 변했다. 89년 남북작가회담 예비 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가두시위를 벌이는 작가들(중앙 백낙청, 우측 현기영 작가, 우측 박태순, 고은, 시인).
2000년대 들어서 시집 시장이 줄어든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먼저 시라는 장르의 역사적 운명이 우리나라에서도 몰락으로 결론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있다.

근대는 소설의 시대였다. 활자의 대량보급과 더불어 시작된 근대는 '읽는 글'의 시대를 열었다.

구전을 필요로 했던 중세가 '외우는 글' 곧 노랫말로서의 시를 필요로 했다면, 근대의 부르주아들은 계급과 가족을 단위 삼아서 벌어지는 치정극에 열광했다. 시는 소설의 그림자로 존재했다.

소설이 펼쳐놓은 활극의 막간극이자 일인극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지금 소설은 다른 장르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쇠퇴해가고 있다.

소설이 그림자가 되어가자, 그림자의 그림자가 된 시 역시 그 근거를 잃고 몰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시집은 몇 백 권밖에 찍지 않는 자비 출판의 대상이 된 지 오래고, 시인은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불우이웃이 된 지 오래다.

2009년 용산참사 현장에서 유가족에게 책을 헌정하는 젊은 작가(69작가선언)들.
우리나라는 시를 존중하고 시인을 우대하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무엇보다도 시는 엄혹한 시대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무기였다. 식민지 시대부터 군부독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는 때로는 선동의 수단으로, 때로는 내면의 토로로, 때로는 게릴라전의 무기로 유력하게 활용되어 왔다.

격문을 쓰는 데, 울분을 표현하는 데, 검열을 피하는 데 가장 적절한 장르가 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대가 시의 시대가 된 것은 이런 까닭이다. 광주의 상처가, 독재자의 탄압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 후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듯 보이자, 사람들의 꿈은 부동산으로, 주식으로, 연금으로 급격히 옮겨갔다. 2000년대 들어 시집 코너를 밀어낸 것은 자기 계발서와 경영서다.

게임에서 만화에 이르는 수많은 오락거리도 책장을 덮어버리게 했다. 이야기들은 판타지에서 무협까지 나날이 증식해가고 화면은 3D에서 CG까지 점점 정교해지는데, 책은 여전히 제자리다. 광고문안과 같은 짧고 쉽고 자극적인 단문이 정교한 사고와 섬세한 감정을 보장하는 문장들을 밀어냈다. 게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시집들이라니!

마지막으로 개인 블로그와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되면서 시집 판매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영화에서 음반 시장에 이르기까지 불법 다운로드의 대상이 되지 않은 시장이 없지만, 적어도 언어 예술의 분야에서는 시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시는 짧아서 입력하기도 쉽고 출력하기도 쉽다. 소설이나 비평처럼 긴 글들은 소스가 공개되지 않는 한 올리기 어렵다. 그런데 시는 언제 어디서나 올라온다. 이름을 얻은 시집이라면, 시인과 제목만 입력하면 거의 모든 본문이 검색된다. 문제는 그런 시들의 경우, 오자와 탈자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장의 첨가와 삭제, 변형이 무수히 일어난다는 점이다.

행갈이 하나, 쉼표 하나에도 뜻이 변하는 게 시인데, 이런 불량 판본이 인터넷에 무수히 떠돌고 있다. 예전에는 빼어난 시인의 경우(상품으로 소비되는 대중화된 시들은 제외해둔다. 이런 시들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이 만 권 정도가 팔렸는데, 요즘은 오천 권 정도로 줄어들었다. 만 오천 권을 인터넷이 먹어버린 셈이다.

시집 시장의 위축과는 다르게, 시와 시인에 대한 관심은 문학계에서 뜨겁다. 왜 그럴까? 시는 당대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정치적 바로미터다. 1980년대에는 정치가 시를 필요로 했다. 이제 정치는, 경제는, 그리고 사람들은 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이때가 시가 정치를, 경제를, 그리고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때다.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살 만해졌다고 하는 지금이 정말로 살 만한 때인가? 용산과 부엉이바위와 뉴타운과 4대 강과 일제고사와 행정수도에 대해서, 시는 직접 말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것의 영향과 결과를 상상한다. 시는 언제나 사는 세상과 살고 싶은 세상 사이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언제나 후자의 편에 선다.

그것은 간단한 산술의 결과이기도 하다. 만 권의 시집을 파는 시인이라면 톱클래스에 드는 시인인데, 그래봐야 인세가 700만 원이다. 평균 4~5년에 한 권을 낼 수 있으니, 연봉으로 치면 150만 원 정도다. 거기에 원고료가 일 년에 100만 원 정도이니, 시만 써서는 최저생계비 근처에도 못 간다. 그러니 시인이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시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가장 먼저 구현한다. 미는 언제나 어떤 위반과 결여와 과잉의 소산이다. 전대의 미에서 벗어나고 모자라고 넘치는 영역이 새로운 미의 영역이 되는 법이다. 시는 패션 트렌드와 비슷하다. 시가 구현하는 미의 영역을 잘 살피면, 미래의 미적 기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전에는 시가 오직 정치의 전위였다면, 지금의 시는 미학의 전위이기도 하다. 그러니 시에 대해 주목할 수밖에. 새로운 미학을 구현했다고 평가되는 소설과 영화와 연극의 언어를 잘 살펴보시라, 거기에는 언제나 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따라서 시는 독자와 친해지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시인들에게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쓸 것을 강요하는 완고한 주문이 있어 왔으나, 그것은 시와 시인을 망치는 어리석은 주문이다. 좋은 시는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는 시가 아니다(시가 눈높이교육이라면 독자가 초등학생이란 말인가?). 좋은 시는 독자에 맞추어 언어의 수준을 낮추는 시가 아니라, 언어에 맞추어 독자의 수준을 높이는 시다. 좋은 시는 어려울 수도 있고 쉬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의 난이도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정확하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구현했느냐다.

지금이야말로 시의 시대다. 시집은 점점 더 안 팔리겠지만, 적어도 시인은 제 시 안에서 미학적인 자유를 누린다. 시가 정치를 요구하는 때이지 정치가 시를 요구하는 때가 아니다. 시는 권력에도 자본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시장과 유리된 채 달아오르는 시적 열기는 그러므로 이상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사정이 아직까지는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다.

좋은 시집은, 그것이 쉽건 어렵건, 적어도 초판은 팔린다. 시인들은 자신의 시집이 많이 팔리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많이 팔아봐야 700만 원을 벌 뿐이니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미답지를 개척하는 것이며(미학적으로), 그로써 살 만한 세상의 스냅사진 한 컷을 동시대의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것이다(정치적으로).



권혁웅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