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갤러리] 정주희 개인전 <얼룩>
무엇이 선택의 과정을 좌우하는가. 가치관과 이해 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압도하거나 뒷받침하는 시각성이다.
폭격된 마을 풍경은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 그 자체다. 천안함 실종자 가족의 애통한 표정은 이 사고를 설명하려는 모든 사회적 움직임의 기폭제다.
감각과 동떨어져 작동하는 순수한 이성은 없으므로, 어떤 근엄한 역사적 서술도 실은 그 안의 인간들의 자잘한 감각과 감정의 격동이다. 설명될 수 없는 요소가 더 많고, 측정할 수 없는 영향이 더 크다. 대부분은 선택되지 않아 생략된 채다.
정주희의 작품은 그 점을 복원해낸다. 통념적인 역사를 다시 그리고, 바꿔 그린다. 선택된 것과 생략된 것, 전해지는 것과 침묵된 것의 경계에서 서성거린다.
'미군 탱크가 마을로 진입하고 있다', '약 400여 명의 미군 낙하산 부대원들이 평양 부근의 들판에 투입되고 있다.' 왜 아니었겠는가. 초여름의 풍경은 찬란했을 것이고, 멀리서 본 신식 문물들은 무기이기보다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이 평상의 시각에 겨우 점으로 찍힌 폭력의 전조를 가늠하는 순간 우리 마음을 찾아드는 먹먹함이 바로 전쟁이다.(<6.25>)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언뜻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진압당해 뒹구는 이들, 그들이 지니고 있었을 상처와 고통스런 표정들이 실의 형태로 뭉그러져 있다.
주인공들의 몸과 마음이 실처럼 해체되었단 뜻일까, 그 시대가 저렇듯 말이 안 되었단 뜻일까, 적나라한 인간의 고통을 차마 볼 수 없어 바꿔 그린 것일까. 작가는 풀어져 무너진 '인체'마다 몇 가닥을 뽑아내어 서로 엮어 놓기도 했는데, 이는 처참할지언정 포기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 간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5월18일>)
정주희의 역사는 일련의 연대표도, 몇 개의 이미지도 아닌 당시 혼란상의 감각적 복원이다. 작가는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정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