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시크] 세계 13위 경제대국 불구 내세울 만한 강력한 문화적 이미지 없어'프렌치 시크','재패니즈 시크' 처럼 한국 문화의 숨은 매력 알릴 때

시각시전 송성재 작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한국에는 세계 무대에 내세울 만한 강력한 문화적 이미지가 없다."

최근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문화비평가인 기 소르망의 이 같은 일갈에는 쉽게 대꾸할 말이 찾아지지않는다. 그는 '한국에는 문화가 없다'가 아닌 '문화적 이미지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전쟁, 한강의 기적, 88 올림픽… 한국은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세계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놀랍도록 달라진 모습이라는 점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가장 최근에는 IT 강국이라는 이미지로 등장했다.

지난 해 10월 CNN이 한국 특집으로 방송한 'eye on South Korea'에서는 싸이월드는 물론이고 아침부터 PC방에 죽친 '컴퓨터 폐인'들까지 영상을 탔다.

필립 바우링 전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 편집장은 뉴욕타임즈에 'South Korea rising'이라는 제목으로 컬럼을 기고하며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한반도나 북핵 문제에서 이제 정상적인 중진 국가로의 역할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 사무총장 배출, FTA 협상 체결 등을 예로 들었다.

다니엘 조의 도자기 촛대
올해 11월 에는 G20 금융정상회의가 한국에서 열린다. 세계 정치와 경제를 주도하는 국가들의 모임 G8에 신흥강대국이 포함된 G20의 의장국이 되었다는 것은 세계 속 한국의 위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증거다. 2012년에는 한국 외교사상 최대 규모인 50여개국 정상이 모이는 핵안보정상회담도 한국에서 열리는 것으로 확정됐다. 세계 경제와 정치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아니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수두룩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일련의 국제 행사들과 몇몇 휴대폰, 자동차 브랜드를 제외하면 한국의 인지도는 6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다. 이 무슨 손해 보는 장사인가? 우리가 정말 휴대폰 조립밖에 할 줄 모르는 '돈벌레(economic animal')였다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시아 한 구석의 나라에 대하여

"한국이 이미지의 부족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 부족은 경제적이나 외교적 측면에서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세계의 소비자가 프랑스제, 미제, 일제를 선호하는 것은 그 나라에 대해 갖고 있는 문화적 이미지 때문이다." 한 신문의 최근 사설이다.

한국에도 문화적 이미지가 있을까? 일본의 정적이고 섬뜩하고 기발한, 인도의 영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프랑스의 우아한, 독일의 깐깐한, 스웨덴의 가볍고 합리적인.

세컨드 호텔의 숟가락 모양 병따개
이제 경제력에 대한 자부는 그만 해도 충분하다. 지금은 세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니 우리조차도 잘 모르는 한국의 문화적 매력에 집중할 때다. 현재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 세계의 머리 속에 심어줄 한국의 스타일, '코리안 시크(Korean chic)'에 대해 이야기할 시점이다.

시크(chic)라는 말은 패션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다. '멋있는, 세련된' 이라는 의미지만 하나의 고정된 양식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질 때 시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의 패션과 멋스런 생활 양식을 통틀어 이르는 '프렌치 시크'가 시초이고, 80년대 겐조, 요지 야마모토 등 일본 디자이너들이 파리 패션계를 뒤흔든 뒤에도 '재패니즈 시크'라는 단어가 남았다.

시크는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 나라의 향기 같은 것이다.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어떻게 역경을 극복해나가는지에 대한, 사람으로 치면 가치관과 취향, 더 나가서 영혼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반만년에 걸쳐 문화적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한 민족으로 그 향기가 풍부하고 정체성이 뚜렷하다. 그러나 코리안 시크가 세계의 시점에서 본 한국의 문화적 매력이라면, 즉 세계가 그 주체라고 한다면 한국 문화의 역사는 대폭 짧아진다.

현재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 분야 - 패션, 영화, 문학 등은 모두 1900년대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시작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식과 글자는 일제 강점기에 한번 크게 훼손돼 허리가 뚝 잘려나갔다가 다시 이어 붙인 형상이다. 억울하지만 우리는 중간에 한번 끊어졌던 역사를 인정하고, 5000년짜리 역사 중 최근의 100년만을 가지고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10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지 않고 4900년이란 세월도 헛것이 아니었다. 일제 시대와 한국 전쟁, 경제 성장 시대를 지나며 한 세기 동안 거칠고 급하게 유입된 서양 문물은 우리의 뼈 속에 박혀 있는 전통 문화와 합해지면서 한국만의 '어떤 것'을 만들어냈다.

최신 방송 트렌드인 리얼리티 쇼에서 보여지는 출연자들의 태도에는 유교적 관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버즈알아랍 7성 호텔의 셰프였던 에드워드 권의 음식에는 한식의 조리법과 식재료가 엿보인다. 한창 일제 강점기였던 1920~30년대의 문화를 다룬 <모던라이프 언파레드>에서는 '문화 전통'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 사이의 틈을 메웠다.

"문화 전통은, 전래된 과거 문화 유산의 성격 규명에 초점을 맞추는 전통 문화와 달리 문화 향유 주체들이 전래된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향유하면서 유입된 외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내부에서 시작된 진짜 한국적 시크함

한국 현대 문화의 정체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제서야 겨우 코리안 시크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인들 스스로 우리 문화의 매력을 인정하고 향유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구 문물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과 여기서 자라난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범벅된 상태가 아주 최근까지 이어졌다.

한글보다 영어를 세련된 것으로 여기고 스파게티에는 1만5000원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비빔밥은 5000원을 넘어가면 외면하는, 그 와중에 '양키 고 홈'은 꾸준히 외치는, 모순적이고 이지러진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최근 자국민, 그것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활용되는 한국 문화 콘텐츠는 이제야 우리가 진통의 과도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는 과거에 억지로 강요된 "국산품을 애용하자" 운동이나 냄비처럼 끓는 적대적 국수주의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새오름길'과 '가로수길'의 위상 차이를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둘 다 한글로 된 지명이지만 전자는 정부 주도로 만들어졌으나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사장된 문화이고, 후자는 대중의 입에 수시로 오르내리며 뚜렷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갖게 된 살아 있는 문화다. 막걸리가 강남의 트렌디한 바에서 와인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하이엔드 패션지에서 영어 대신 한글 제목이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국제적인 상황도 한 몫 했다. 세계는 길게 늘어지는 불황과 혼란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할 신선한 문화를 기대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아시아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암묵적인 믿음이 있다. 일본 문명은 알려질 대로 알려졌으며 중국은 그 커다란 덩치를 일으키기에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점이예요."

블랙아이드피스와 마릴린맨슨 등 세계적인 뮤지션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는 디자이너 이주영은 해외 전시에서 패션을 포함한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을 전했다.

코리안 시크를 규명하는 일은 우리 문화의 매력에 스스로 취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문화제국주의 주체로서의 전초작업도 아니다. 앞으로 점점 더 거세질 세계화의 흐름 앞에서 지난 100년간 험난하게 빚어진 한국 현대 문화의 색깔에 대해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기 위해서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