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전시공간] 혼성 공간 <꿀>의 최정화 작가'생생활활'한 감동을 함께 발효하는 미술 공간… 다양한 벌집서 흥미진진한 실험

"이름이 왜 꿀이지?" 라는 의문은 공간을 둘러보는 동안 절로 해소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응접실이 펼쳐지고 그 막바지에 뚫린 개구멍으로 나가면 계단이 하늘로 이어져 있다.

옥탑방 한쪽엔 다락방이 숨어 있고, 한숨 돌려 계단을 내려가면 반지하의 통로로 쑥 빠진다. 동굴을 연상시키는 그 곳에는 크기와 모양, 빛과 바람을 품는 아량마저 각기 다른 방들이 다닥다닥 있다. 그야말로 벌집이다.

꿀은 최정화 작가가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문을 연 공간이다. 작가는 "쥐어짜고 쥐어짜고 덧붙이고 덧붙인 생활 건축, 민간 건축"의 생김에 한눈에 반했다. 한때는 제각각 슈퍼마켓, 쌀집, 중국집, 감자탕집, 꽃집, 그리고 누군가 밥 먹고 다투고 공상하고 잠을 잤을 집들과 그 내력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그 무궁무진한 속은 작가의 영감을 통해 전시장이자 까페, 기획 사무실이자 작은 광장, 레지던시이자 아트숍이라는 혼성의 장으로 재탄생했다. 외벽에서부터 전등갓, 의자와 화장실까지 어디든 미술이고, 누구나 쉬어갈 수 있으며 작가들의 반상회가 열리는 곳이다. 반지하의 방들은 대안공간 풀과 함께 기획하는 미술 공간 '꿀풀'로 개방되었다. 7명의 작가들이 1기로 활동을 시작했고 6개월마다 다른 작가들이 입주한다. 이 모든 기능이 유기적으로 엉켜 있다. 백화점보다 시장에 가깝다.

이곳에서 무엇이 미술이고 무엇이 전시품인지를 가리는 일은 쓸 데 없다. 예를 들어 꿀풀 작가 중 한 명인 이수성이 선보인 '작업'은 건물 외벽의 녹슨 파이프를 광내는 일이었다. 판매용 수공예품 제작과 전시를 위한 작업을 병행해 왔던 김상진 작가는 방에 작업장을 차려 두 일을 넘나들고 있다.

공간 내부와 주변 환경도 통한다. 꿀 안의 다양성은 재개발 직전 오래 된 동네에 있는 근대화의 흔적이기도 하다. 근처 이태원의 다문화적 경관과도 이어지며, 주민과 더불어 노는 일들도 벌일 예정이다. 공간 자체가 지역의 역사와 삶을 연속시키는 미술 프로젝트인 셈이다.

"천장 보세요, 천장. 저런 게 바로 근대문화 유산이죠. 싸이 톰블리(그래피티를 모티프로 삼은 회화 작품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가 흉내낸 것이기도 하고요." 최정화 작가의 손가락이 언제 그려졌는지도 모를 색색의 낙서를 가리켰다. 유리창과 간판에도 옛 가게의 자취들이 남아 있다. 우리와 함께 살고자 저 멀고 우아한 전시장을 탈출한 현대미술의 한 광경이다.

지난 20일 이 흥미진진한 양봉장을 만든 최정화 작가를 만났다.

이 공간은 어떻게 찾아냈나.

-젊은 작가와 만나고, 창고로도 쓸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었다. 이 동네에 관심이 있어서 왔다가 발견했다. 역사 속에서 민간인들이 만들어 온, 이를테면 건축가 없는 건축이 살아 있었다. 과거를 보여줄 수 있는 모양새에 끌렸다.

꿀을 만든 데에는 공간 보존의 의미도 있는 건가.

-오래된 동네를 재개발로 지우고 버리고 가리기보다 묵히고 삭히고 버려두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게 다 시민의 미감 아닌가. 칠레의 발파라이소는 여기보다 더 낡고 가난한 동네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우리는 자꾸 감추려고만 한다.

오래된 동네와 골목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나 보다.

-스스로는 '골목질'이라고 부른다. 어디 가든 생활이 있는 장소를 찾는다. 예를 들면 시장이다. 그 곳의 '생생활활'한 정서가 조각이나 그림보다 더 감동적이다. 삶의 공간도 김치나 장처럼 발효되어야 멋있는 것 아닌가.

꿀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어떤가.

-많이 도와주고 궁금해 한다. 이 건물 주인도 처음엔 개발할 의향이었는지 몰라도, 이렇게 만들어 놓으니 좋아하시는 것 같다. 오프닝 때는 주변 밥집, 술집이 꽉 차기도 했고. 여기가 잘 운영되면 동네의 재개발 속도나 방향도 달라지지 않을까. 개발의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려면 주민과의 만남도 중요하겠다.

-몇 달 전부터 많이 만났다. 앞으로는 주민이 주인공인 축제를 기획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태원의 다문화성을 살려 여러 놀이 문화를 만나게 하려고 한다. 이 근처에는 특히 아프리카인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이미 몇 명이 와 보고는 좋아하더라.

꿀풀 입주 작가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나 .

-실험성을 가장 높이 생각한다. 그리고 작업에 교감이 있느냐, 문제 의식이 있느냐다. 자기와 상대와 세계에 어떤 질문을 하느냐, 말이다.

후진 양성에 힘쓰는 건가.

-그냥 만나서 잘 놀자, 정도다. 후진은 무슨, 내가 후진이다.(웃음) 작가 스스로 공간 사용 방법을 제시하고 할 일을 기획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여러가지 실험이 이루어지 않을까.

꿀의 홍보 멘트를 하나 해준다면.

-공간은 사람이 와야 완성된다. 꿀은 계속해서 완성시켜가야 하는 그릇이다. 그러니 와서 주인이 되어 달라.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