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전주국제영화제를 가다] 배창호 감독국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 영화 <여행>의 감독으로 종횡무진

배창호 감독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바쁜 이였다. 국제경쟁 부문의 심사위원이자 상영작 <여행>의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제 기간 내내 영화의 거리 곳곳에서 배창호 감독이 보였다. 큰 키 때문에 남들보다 보폭이 조금 더 넓고, 그래서 조금 더 멀리 보고 조금 더 여유롭게 걷는 모습이 그의 영화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당대의 풍속도들이다. 현실사회에 단단히 발 붙였으면서도 그 세속의 욕망들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탐색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그의 영화는 조금씩 더 정갈하고 순해지고 있다. 인간을 자연 속에서 담아내는 경향도 있다.

<여행>도 그 맥락에 있다. 친구와 연인 사이의 20대 남녀 여행자, 엄마를 찾아 섬을 떠나고 싶어하는 10대 소녀, 아내와 엄마로 사는 삶에 지쳐 훌쩍 혼자 여행 온 50대 여성의 이야기를 제주도의 풍광 속에 술술 풀어 놓는다. 그들 각각의 삶의 모습과 욕망을 존중하면서도 문득문득 개인을 넘어서는 인간과 자연의 이치가 있노라고 다독이는 인상의 영화다.

건국대 교수 시절 배창호 감독은 학생들에게 "영화보다 인생을 더 아끼라"고 말했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는 일은 그보다 더 훌륭하고 어려운 일"이란 이유에서였다.

영화 '여행'
지난 1일 전주에서 만난 배창호 감독은 그 시절에 대해 "가르쳤던 내용보다도 학생들과 서로 나눈 정분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멀리서 볼 때보다 더 키가 크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와는 인연이 좀 있으신지요.

지난 작품들이 몇 번 소개됐지요. 작품이 없어도 자주 왔어요. 워낙 문예적 전통과 토속적 환경이 있는 지역이어서요.

관객과의 대화는 오랜만이셨지요.

20대 관객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세 번째 이야기는 삶을 좀 살아보고, 고통도 느껴본 관객층이 공감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요. 그래도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는 잘 공감해준 것 같아요.

첫 번째 이야기는 건국대 학생들과, 두 번째 이야기는 따님과, 세 번째 이야기는 사모님과 함께 작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삶의 경험이 없으면 시나리오를 쓰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죠.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이에요. 각각의 이야기의 인물들과 같은 세대인 지인들에게서 그 심정과 행동을 끌어냈죠.

그래서인지 영화가 쉽고 리얼합니다.

-이번 영화는 극장에서도 개봉하고 아리랑TV에서도 방영하는 프로젝트에요. 제주도를 세계 시청자에게 소개하는 임무도 띠고 있죠. 폭넓은 관객층이 편안하게 보도록 만들어야 했어요. 그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애정을 담아 찍었죠.

경구 같은 몇몇 대사가 마음에 남습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이야기에서 남자 주인공이 돌에 카메라를 들이대곤 기다리면서 말합니다. "돌이 마음을 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 이제 찍어도 된다면서 자기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다"라고.

어느 작가의 인터뷰 기사에서 기억해 놓았던 문장이에요. 편견으로 보지 말고 대상의 입장에서 봐야한다는 뜻이죠. 그게 영화의 의의일지도 몰라요. 영화는 우리가 편견을 가졌던 것, 무심코 스쳤던 것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니까요.

장소를 인물과 어우러지게 하시는 시선도 좋았습니다.

요즘 영화들은 장소와의 연관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요. 내 영화에서 장소는 인물이 녹아드는 배경이면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어요. 예를 들면 <러브 스토리>는 강북의 지형을 담았고 <흑수선>에서는 옛 서울역이 중요하게 쓰였지요. <꿈>에는 지금은 불타 없어진 낙산사가 나와요. <정>과 <길>에는 남도의 문예적 풍경이 있고요. 이런 기록이 나중에는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단지 주문 생산되는 상품만은 아니라는 거지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최신 영화를 많이 보셨을 텐데, 요즘 영화들 경향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묘사에 치중하는 영화들이 많아요. 카메라가 많아지고 쉽게 쓸 수 있게 되면서 거르지 않고 복제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 같아요. 하지만 눈으로 본 것만 포착한 영화는 예술이 아니지요. 눈으로 본 것의 형체를 마음으로 느껴 다듬어야 해요. 안목과 연륜이 필요한 일입니다.

젊은 감독들 중 눈여겨 보시는 분이 있나요.

작년 전주국제영화제 <숏!숏!숏>에 참가했던 윤성호 감독과 양해훈 감독이에요. 윤성호 감독은 영화적 재치와 사회적 시각을 갖췄죠. 영화가 현대적이면서도 예민해요. 양해훈 감독은 인간의 심리를 깊이 있게 보는 것 같고요.

인생 선배로서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화에 속지 말라는 거예요. 꿈은 소망과는 다르죠. 잘 안 이루어져요. 자신을 냉철하게 보는 게 필요해요. 때로는 꿈을 접는 고통도 감내해야 하죠. 하지만 원하지 않는 삶을 받아들이고 가는 삶도 가치 있는 삶이에요. 뭘 잃고 뭘 얻을 것인지 자신을 잘 알고 판단해야 합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