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로 간 예술가들]'리슨 투 더 시티', '가리봉 동네 한바퀴', '413' 동네문화 창달 전도 나서

예술가들이 동네로 향하고 있다. 생활 현장을 답사하고, 공장 틈에 작업실을 차린다. 심지어 관객들까지 초대해 뒷골목을 함께 누빈다.

가게 간판, 시장통의 먹을 거리, 자투리 땅의 잡초와 임자 없는 쓰레기까지 동네 구석구석이 이들에겐 예술의 주제고 재료이다. 이들이 동네 문화 창달과 전도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리슨 투 더 시티, 재래시장에서 서울을 찾다

박은선 작가와 정진열 디자이너, 영국의 건축예술 프로젝트팀인 스태틱은 '리슨 투 더 시티 서울 투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서울 내 3군데 코스를 참가자들과 함께 걸으며 구경하는 관광 프로그램이다.

5월 15일에는 신당동 중앙시장 일대에서 출발해 황학동 구제상가와 동묘 벼룩시장, 롯데캐슬 베네치아에 도달하는 제1코스가, 21일에는 인왕산과 독립문 영천시장을 거쳐 교남동 재개발지역으로 향한 제2코스가 진행되었다. 22일에 공개된 제3코스는 종로 광장시장을 둘러보고 동대문의 완구, 문구류 도매시장과 외국계 대형마트를 비교 체험하는 것이었다.

관광 코스는 재래시장과 재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선정 기준은 크게 세 가지였다. 서울의 자생적 역사가 남아있는 곳, 도시를 둘러싼 지속성과 개발 간 갈등을 잘 보여주는 곳, 곧 사라지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곳이다.

예를 들면, 인왕산은 서울이 시작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인왕산 선바위는 조선을 건국할 때 성 안에 포함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다투었던 곳이며, 국사당은 왕을 위한 굿이 벌어지던 곳이다. 이런 기원 때문에 인왕산 일대에는 무속인들이 모여들었고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왕산도 지금은 콘크리트 벽에 막혀 있다. 올라가는 입구에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선 것이다.

재래 시장과 외국계 대형마트를 함께 보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 지역의 고유성을 지우고 있다는 문제 의식에서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획일화된 상품들이 각국의 시장 풍경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프로젝트에 참가한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특별한 과제가 주어졌다. 동대문 대형마트에서 자신의 고향에서도 파는 물건을 사도록 했다.

이 프로젝트는 참가자들이 동네들을 가로지르며 서울의 변동과 그 안의 갈등을 체험하도록 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 도시의 개성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주인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박은선 작가는 "잘 기록되지 않는 것들을 직접 기록해 보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6월 5일에 제1코스, 20일에는 제2코스 관광이 한 차례씩 더 진행되며 9월에는 영국 리버풀에서도 같은 내용의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그 결과는 영국과 서울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남은 일정에 참가하려면 박은선 작가의 이메일 으로 연락하면 된다.

<가리봉동네한바퀴>
이주의 역사 몸으로 기억하는 '가리봉 동네 한바퀴'

이수영 작가와 리금홍 작가는 가리봉동의 안내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5월 22일 '가리봉동네한바퀴' 프로젝트를 시작해 참가 신청을 받고 있다. 가리봉동은 '연변거리'가 있을 정도로 조선족이 많이 모여 사는 곳. 작가들은 참가자들을 이끌고 식당과 거리, 시장을 누비며 이곳의 풍물을 설명해준다. 시장 뒤 주택가의 한 쪽방에 지친 몸을 잠깐 누이는 것으로 일정이 끝난다.

가리봉동은 간판부터 다르다. '진달래'가 그렇게 많다. 진달래식당 옆 진달래구육점을 지나치는데 이수영 작가가 덧붙인다. "얼마 전 중국 연길에 다녀왔는데 거긴 광장 이름도 진달래더라고요." 식당 메뉴도 한글이되 한글이 아니다. '밴세', '썩장' 등 낯선 글자가 즐비하다. 밴세는 만두, 썩장은 청국장이다.

"여기 말들은 한국어와 중국어가 혼재된 것들이 많아요. 이주의 역사가 말로 나타난 거죠.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한 아주머니가 "한국말이 더 웃긴다"고 하더라고요. 영어와 뒤범벅된 문장이 많다는 거죠. 한국사람들의 말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이곳의 체험은 이렇게 한국사회를 거울에 비춰 보는 것이기도 해요."

이주민의 외롭고 고단한 삶의 자취도 곳곳에 배어 있다. 몇몇 가게 밖에는 국제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기가 나와 있었다. "지금에야 조선족 사이에도 휴대전화가 일반화되었지만, 예전엔 국제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방'이 성황이었다고 해요."

<리슨 투 더 시티 서울 투어 프로젝트>
시장을 지나 언덕을 올라 골목을 돌고 가파른 계단을 거쳐야 나타나는 쪽방도 가리봉동의 특징이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나무문들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가자 한 평 남짓, 성인 남자의 머리가 닿을 듯한 높이의 방이 나타난다. 화장실은 공용이고 옵션은 작은 TV 하나다. 다른 살림살이를 꾸려 넣을 틈이 없다. 잠만 자고, 상황에 따라 언제든 들고 날 수 있는 정류장 같은 곳. 월세는 보증금 없이 23만 원이다.

"구로공단 시절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이 묵던 곳이에요. 공단이 사라진 후에는 조선족 이주민들이 들어왔죠. 떠나온 곳과 떠날 곳만 있는 삶의 모습이죠. 가리봉동의 조선족들은 세계화 시대 보편화된 이주의 현상을 상징하기도 해요. 국가, 민족의 경계가 어디인지 생각하게 하죠."

이 유동과 경계의 공간은 지금 또 다시 불안한 미래 앞에 있다. 지역균형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된 것이다. 이수영 작가와 리금홍 작가는 작년 가을부터 곧 사라질 가리봉동 문화를 기록하는 작업 '가리봉동 옌벤타운 3부작'을 진행해 왔다. 이번 '둠 투어' 역시 "사라질 공간을 몸으로 기억하자"는 취지다. 6월 8일까지 계속되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려면 작가의 이메일 으로 예약하면 된다.

문래동 공장에서 예술하기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공소가 밀집해 있고 최근에는 빈 공장과 가게에 예술가들이 입주하며 자생적인 예술촌이 형성된 곳이다. 춘천에서 온 젊은 작가 김준수, 정동훈, 김보리도 이곳에 4달 전에 작업실 '413'을 차렸다. 그리고 그 이사와 정착의 과정을 꼼꼼하게 남겨 5월 26일까지 전시했다. 제목은 '문래동 공장과의 즐겁지만은 않은 네 달간의 대화'였다.

<가리봉 동네 한바퀴>
"젊은 작가들이 서울에서 안정적인 작업 공간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죠. 워낙 물가와 지가가 비싸니까요. 공단 지역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를 발견했을 때 '이 곳이다' 싶었어요. 천장이 높고 공간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아서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었고, 작업뿐 아니라 전시도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청소부터 해야 했다. 1년 넘게 문을 닫았던 공장이어서 쓰레기와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작가들은 버리고 비우면서,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을 추려냈다. 공장 안뿐 아니라 동네 곳곳을 부지런히 다니며 쓸 만한 것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모으고 얻은 '동네산' 나무와 타일이 413의 자재다.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동네와 안면을 트게 됐다. 주변 철공소 아저씨들과는 가끔 술 한 잔 마시거나 운동을 함께 하는 사이가 됐다. 전시를 열었을 때는 "고생했다"는 격려를 들었다.

이는 작가들의 예술관이 녹아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갤러리나 대안 공간 등 기존의 미술 제도를 거치기보다 작가가 자립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먼저 꾸려 보겠다는 것. "예술가의 허영과 권력을 버리고 삶의 현장과 호흡하면서 공공적 문화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공공미술의 가장 어려운 점이 지역과 작가 간 교류인 것 같아요. 저희는 이렇게 시작한 만큼 동네를 향해 활짝 열린 예술을 하고 싶어요."

<문래동 공장과의 즐겁지만은 않은 네 달간의 대화>
작업실 이름이 이곳의 주소인 41-3번지를 딴 '413'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전시 내용에는 자연스럽게 지역의 현안에 대한 고민이 녹아 들었다. 산업이 쇠락해 공동화된 이곳의 역사와 삶의 지속성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 가 하나의 화두인 것이다.

413 한 켠에는 조그만 화분들이 진열되어 있다. 동네에서 뽑아온 잡초들이다. "잡초들은 아무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그 나름의 생명력과 삶의 질서를 지닌 존재들인데... 개발논리에 의해 밀려난 것들이라고 해서 다 버려져야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잡초들이 저희 모습 같기도 하고요.(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