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C 미니멀니즘] 60년대 혁명, 90년대 전성기 거쳐 다시 돌아온 미니멀리즘

도널드 주드
90년대 후반, 모든 블라우스와 코트의 단추가 안쪽으로 숨어 들어가는 바람에 왜 그런지도 모르고 낑낑대며 속단추를 채워야 했던 모든 이들에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들어본 적 있는가? 33초, 2분 40초, 1분 20초로 나뉘어진 세 악장이 흐르는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소리가 빠져나간 자리는 무성한 추측이 채운다.

기승전결이나 인과관계로 접근하면 다 틀린다. 애초에 케이지가 그 침묵에 싣고자 했던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당혹스러운 간결함, 부재로 꽉 찬 아름다움, 미니멀리즘이 다시 돌아왔다.

단추 증오자, 스티브 잡스

온 나라가 작은 기계 하나로 최근까지 시끌시끌했다. 아이폰 3G가 출시된 후 조금 잠잠해졌다 싶자 후속작 출시 소식이 들려왔고 대중은 다시금 흥분에 들떴다. 멀쩡히 데스크탑과 노트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아이패드 구매를 놓고 고심하는 중이다.

댄 플라빈
"가지고 다니면서 버스에서 책도 보고 그러면 좋잖아. 타블렛 PC니까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아이폰이 불필요한 인터넷 접속 횟수를 늘린 것처럼 아이패드는 팔자에 없는 독서와 그림 취미까지 만들어줄 판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실 현재 IT 트렌드에서 상당히 어중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 마디로 노트북보다 기능은 떨어지고 아이폰보다 덩치만 큰 아이패드의 인기 원인 중 하나는 그 디자인이다.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 시절부터 유명한 미니멀리즘의 신봉자다. 그가 특히 싫어하는 것은 버튼으로, 잡스는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아 누구도 불평하지 않은 마우스의 투 버튼에 대해 '우아하지 못한 것'이라며 심한 경멸을 표했다.

그는 데스크톱의 전원 버튼과 아이폰의 키패드, 아이패드의 키보드를 없앤 것도 모자라 애플 매장의 대기 라인과 카운터, 급기야는 매장 내 엘리베이터의 버튼까지 없애 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단추 달린 셔츠도 입지 않는다고.

이에 동조하듯 패션계에도 삭제 열풍이 일고 있다. 다양한 트렌드가 공존하는 4대 컬렉션에도 소위 '쪽박'과 '대박'은 존재한다. 지금 가장 먹히는 트렌드를 내놓고 있는 3명의 디자이너 – 느의 피비 파일로, , 의 한나 맥기본은 동시에 미니멀리즘 코드에 주파수를 맞췄다.

로버트 모리스
시작은 으로 컴백한 피비 파일로다. 발맹의 80년대 파워수트가 지배했던 지난해, 어깨는 과장되게 솟아오르고 데님은 나풀나풀 찢어지거나 강한 워싱으로 얼룩덜룩한 가운데, 그녀는 모든 장식과 색깔을 배제한 단순한 옷들로 용감하게 트렌드를 거부했다. 흰색, 검은색, 베이지색만으로 선보인 컬렉션은 칼로 자른 듯이 간결한 선만으로 이루어졌다.

모든 선과 색에는 과장이 없었고 인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 흔한 프린트나 주얼리 하나 없었지만 부족함은 없었다. 부족하기는커녕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모두 성취한 시즌 최고의 컬렉션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여기에 와 가 동참하고 , 질샌더 등 전설의 미니멀리스트들이 뛰어들면서 다가올 유행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지난 6월9일 열린 의 2011년 리조트 웨어 컬렉션에 대해 온라인 패션 사이트 스타일 닷컴은 "Keeping it clean at – where else? – Calvin Klein"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대중은 프라다를 입는다?!

1960년대 미니멀리즘이 탄생했을 때 동시대의 예술 사조인 팝아트와는 달리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기존의 미학에 의문을 표하고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팝아트가 누가 봐도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본능적인 미감을 자극했다면 미니멀리즘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프랭크 스텔라
텅 빈 방, 까맣게 칠한 네모, 하얀색 입방체. 미니멀리스트들은 감정과 은유로 가득 찬 회화, 조각 대신 페인트 붓이나 공업용 에나멜 도료 등 산업 재료를 사용해 가장 근본적인 뼈대만 남겨 놓았다.

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작가의 기발한 정신 세계가 아닌 물질 그 자체로, '작가는 고독한 천재가 아니며 예술은 산업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자폭성 메시지는 그 자체로 너무나 기발하고 진솔하며 혁신적이었다. 이는 곧 패션, 음악, 문학 등 다른 분야로 급격하게 퍼져 나가 소리 없는 음악, 서사 없는 문학을 줄줄이 탄생시켰다.

패션 쪽에서는 색상의 절제(흑 또는 백), 디테일의 생략, 크기의 최소화(미니 스커트, 토플리스 수영복), 재질감이 없는 편편한 소재, 인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저지, 라이크라 소재로 나타났다. 당시 의복들에 비해 미니멀리즘 패션은 지극히 기능적이면서 반항적인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젊은 층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초창기 미니멀리즘이 어느 정도 혁신을 위한 혁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90년대는 순수 예술과 시장이 비로소 서로의 매력을 발견한 시대다. 천박하고 요란한 80년대 패션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좀 더 점잖고 세련되고 깨끗한 아름다움에 대한 목마름이 생겨났다.

마침 아르마니, , 질 샌더, 헬무트 랭, 프라다 등 걸출한 미니멀리스트들이 연달아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순수와 절제의 시대가 열렸다. 온갖 장식은 물론이고 단추와 주머니 같은 기능적 디테일까지 허용되지 않았으며 세상에는 블랙, 화이트, 뉴트럴의 세 가지 색만 남았다.

셀린
딱 떨어지는 아르마니 재킷, 의 무채색 광고 이미지, 질 샌더의 화이트 셔츠가 주는 아름다움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사람들은 이것이 언젠간 지나갈 유행이라는 것을 아예 망각하고 말았다. 장장 10년간 지속된 미니멀리즘의 지배는 패션 본거지를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오는 성과를 거두었고, 사람들은 극도로 장식이 배제된 옷들을 혁신을 위해서가 아닌 아름다움을 위해서 구입했다.

이는 급기야 바다 건너 대한민국에까지 전해졌는데 제대로 된 설명이나 이해도 없이 전파되는 바람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생기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명동의류에서 옷을 고르던 이들은 갑자기 코트의 단추가 다 안으로 숨어버린 것에 어리둥절해야 했으며 남자들은 바지 위로 올라온 팬티를 절대 선(善)으로 여겼다. 한편 까만 색 나일론으로 만들어진 프라다 백은 온갖 카피캣을 만들어내며 국민 백으로 등극했다. 좋든 싫든 모든 이들이 단순하고 간결하게 입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21세기 미니멀리즘

통상적인 유행 주기 10년을 정확히 넘기고 마치 줄 선 듯이 돌아온 미니멀리즘은 여전히 군더더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가슴에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고 있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여성스러움으로,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서른 다섯이 된 피비 파일로는 딱 자기 자신을 위한 옷, 즉 자아가 확립된 30대의 성공한 여인들을 위한 옷을 만들었다. 재킷과 시가렛 팬츠, 펜슬 스커트로 지성과 자립심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늘하늘하거나 섹시한 소재를 사용해 여성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코드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졌던 과거에 비하면 이제는 좀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면모가 돋보이게 된 것이다.

클로에
는 소녀다운 감성을 섞어 부드러운 미니멀리즘을 선보였고, 네팔 디자이너 프라발 구룽은 블랙과 화이트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코트에 60년대식의 구조적인 볼륨을 도입했다. 네모난 패널을 마구 이어 붙인 발렌시아가의 복잡한(?) 미니멀리즘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선과 면만 보였던 90년대에 비해 한층 다양한 이미지가 혼합된 양상이다. 개념에서 무드로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거리를 휩쓴 유행이 80년대 풍이었다고 해서 올해 유행이 90년대 풍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 최근 패션계를 넘어서 IT, 방송, 건축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간결함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미니멀리즘의 정의를 확대해, 반복을 강조하는 후크송이나 연출을 최소화한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같은 범주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매끄러운 메탈의 표면만 강조한 가전 제품이나 형태와 양감을 중시하는 가구도 마찬가지다. 점점 더 기교와 각색이 줄어드는 이런 현상에 대해 흔히 복잡한 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이 보다 단순한 디자인을 선호한다는 분석이 내려지지만 어쩐지 속이 시원하지는 않다.

아침 출근길에 차가 좀 막혔다고 해서 질 샌더 매장에 갈 마음이 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트렌드의 혼재 현상이 더 설득력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 가지 트렌드가 시대를 주도하는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약해지고 있는데, 이는 나올 것은 이제 다 나왔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전성기를 지난 미니멀리즘은 다른 모든 유행을 제압할 만큼 강하지 않고, 그 자리를 메울 만한 새로운 아름다움도 출현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미니멀리즘과 함께 60년대의 풍성한 실루엣, 전원적인 분위기의 로맨틱 컨트리, 미래주의가 동시에 메가 트렌드로 제시되고 있다.

캘빈 클라인
그렇다면 반대로 에스닉이라든지 스포티즘과 달리 미니멀리즘이 유행의 바람에 쓸려가지 않고 꾸준히 트렌드의 한 구석을 차지하며 자가진화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본질에 집착하는 태생적 성격 때문이다. 근본적인 색, 근본적인 형태, 근본적인 구조는 미니멀리즘의 영원한 자신감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은 여기에 힘을 더한다.

"만약 한 산문 작가가 자기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생략할 수 있으며, 작가가 충분히 진실되게 글을 쓰고 있다면 독자들은 마치 작가가 그것들을 진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참고서적 : 아방가르드는 없다, 미니멀 아트
사진출처 : style.com


스텔라 맥카트니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