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진의 무한 변주] 조각, 회화, 설치, 영상등과 이종교배 이어져

권오상 C-print, Mixed media 2009 사진 제공 : 아라리오 갤러리
조각을 전공한 권오상은 사진을 중요한 매체로 사용한다. <데오도란트 타입> 시리즈로 대변되는 그의 작업은 평면적인 사진이 입체성을 갖게 되면서 '사진 조각'으로 불린다.

모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수천 장의 부분으로 찍어낸 사진을 실제 사람 크기로 조각한 아이소핑크 위에 낱장의 사진을 붙여가는 방식이다.

그의 작품을 본 영국 록 밴드 '킨(Keane)'은 앨범 재킷을 킨의 멤버들을 모델로 만든 '사진 조각'으로 꾸미기도 했다. <보그>, <바자>와 같은 패션지와 나이키나 팬디 같은 명품 브랜드들의 러브콜 역시 끊이지 않는다. 권오상은 사진이 조각의 조합을 통해 흥미로운 작품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현대 사진의 특징 중 하나는 매체의 유연함으로 나타난다. 장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사진의 영역이 확장되기도 하고, 타 장르 속에서 적극적으로 사진을 이용하기도 한다. 처음엔 회화를 하던 작가들이 사진과의 혼용에 가장 적극적이었지만 지금은 사진, 조각, 회화, 설치, 영상 등이 결합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현미 작가의 작품은 언뜻 보통의 회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조각과 회화, 사진이 혼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자나 전화기, 탁자 같은 일상의 사물을 석고붕대로 고정해 그림처럼 덧칠된 후에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지는 과정을 거친다. 일상의 사물을 조각에서 회화로, 회화에서 또다시 사진으로 완성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작품은 현실과 가상의 간극을 맴돈다.

정연두 '시네매지션'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사진과 회화의 은밀한 동거를 주선해온 이는 배준성 작가다. 그는 동양 모델의 나신을 사진으로 찍고, 그 위에 우아한 드레스를 그려 놓은 비닐을 덮어 관람객들에게 '들춰보기'를 권유한다.

작품을 보는 각도에 따라 드레스를 입었다, 벗었다 하는 작품은 여러 개의 레이어를 하나로 혼합한 렌티큘러 작업을 통해 가능해졌다. 앵그르(J.A.D. Ingres)나 다비드(J.L.David)의 명화를 차용하고 서양의 박물관 내부 전경의 합성을 통해 현대의 동양의 여성이 명화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콘크리트 벽, 나무 바닥, 창틀. 말없이 고요하기만 한 일상의 공간에 장유정은 파동을 일으킨다. 이 공간에 작은 그림자를 그리고 사진으로 남기는 식이다. 전기선, 혹은 메모가 적힌 작은 종이나 어긋난 벽면에 의도적으로 그려 넣은 그림자는 장소를 입체적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실재 공간마저도 그림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고요한 벽면과 말없는 바닥 면은 이런 식으로 한 곳에서 만나면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네모난 귤, 네모난 사과 등 여섯 각도에서 찍은 이들 과일을 그대로 붙여 직육면체로 만든 권정준. 그는 마치 실제 귤의 껍질을 벗기듯 주변에 껍질도 사진으로 촬영해 같은 위치에 놓아두었다. 사과 역시 조각을 내어 씨앗이 드러나 보이게 '해부'를 해 보이지만 그것은 입체임에도 여전히 평면적이다.

권 작가는 이 같은 작업을 통해 오히려 사진의 평면성과 사실에 대한 재현력(representation)에 대한 회귀와 믿음을 공고히 한다. 사진을 찍는 이유를 '그림보다 진짜 같아서'라고 밝히는 작가는 조각의 형식을 빌어, 아무리 복잡한 입체라도 평면화시키고 마는 사진의 속성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유현미 Still Life(비행,flight) 2007 제공 : 김영섭사진화랑
영화, 연극, 미디어, 사진 등 매체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넘나드는 정연두. 그는 장르의 무법자이기도 있지만 동시에 그의 작품은 곧 영화이자, 연극이고, 회화이자, 사진이고, 또한 설치미술이 된다. 현대미술계의 핫 스팟인, 뉴욕에서 주목 받는 작가 중 한 명인 그는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든다. 아니, 이 둘을 묶어낸다.

보통 사람들의 '꿈'에 파고들어간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삶을 담기 위해 직접 춤을 배우면서 <보라매 댄스홀>로 기록했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음식배달원의 모습을 액션 배우처럼 보이는 <영웅>으로 촬영했으며,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녀의 에스키모 여전사란 꿈을 <내 사랑 지니>로 이뤄주었다.

또 어린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을 재현해 사진으로 남기는 <원더랜드>에도 신비롭고 동화적인 상상력이 넘쳐난다. 꿈과 현실을 간극을 사진이란 매체로 매워온 셈이다.

조소와 설치를 전공하며 사진을 직접 배운 적도 없는 정연두 작가는 사진작가로 불린다. 사실 그의 방대한 작업을 담아내기엔 무리가 있는 타이틀이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매체보다 먼저 오는 것은 상상력과 아이디어라고.

정연두 작가의 행보를 봤을 때, 사진의 타 장르와의 조합 가능성은 무한대인 듯하다. 작가의 발랄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존재하는 한, 아마도 현대 사진의 타 장르와의 이종교배로 태어나는 신비한 완성체는 지금 보여지는 것 이상일 것이 분명해 보인다.

배준성 작가의 A.Pierre Cot 071003 제공 : 가나아트센터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