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갤러리] <지휘부여 각성하라> 전

잭슨홍, Naive and Optimistic, 2010
지배자의 덕목을 지혜라고 말한 플라톤의 <국가>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각성하고 또 각성함은 지휘부의 첫째 조건일 것이다.

지휘부더러 각성하라는 요구는 그러므로 '집 앞 청소는 내 손으로'나 '택시요금은 미터기대로' 같은 정당한 것일 텐데 정작 그 말을 한 경찰은 파면당했다. 지난해 일어난 일이다.

촌스러운 일이다. 당시 '지휘부여 각성하라'는 신문기사 헤드라인은 시대에 안 맞게 비장해 보였으나, 정작 시대는 그것에 정색했다. 이토록 꽉 막히고 권위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라는 사실을 땅땅, 못 박아 공표했다.

이 시대의 촌스러움은 그러나, 아무리 무서워하려 해도 어쩐지 우습기도 한 것이다. 민주화된 지 20여 년이 지난 G20 국가에서 의무와 책임을 묻는 일이 금기시되어 있다니.

이상한 일을 괴상하게 표현하는 것이 의무이자 책임인 작가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먹잇감이다. 전시 <지휘부여 각성하라>에서 한 문장의 아이러니는 한국사회의 구조를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옆에서 기웃대는 작업들로 일파만파 퍼져 나간다.

주재환, 자화상, 2010
잭슨홍의 작품들은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대응의 비장한 관습을 풍자한다. 불타는 헬멧과 붉은 색으로 재현된 1970년대 한국디자인포장센터의 구호는 그 뜻이 지나쳐서 유머러스할 지경이다. 주재환은 알맹이가 쏙 빠진 액자를 전시한다. 지휘부가 해온 일이 이 모양이라는 일갈이다.

홍성민의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지휘부의 상징으로 삼아 휘두른다. 여러 명의 줄리엣이 등장해 각각 나름의 예술평론을 연기하는 무대는 예술의 전통과 현학이라는 권력을 비트는 시도다.

최민화 작가의 '하얀 유원지'는 작품이 그려진 15년 전에 비추어 지금 무엇이 다른지 묻게 한다. 작가의 기억에 최루탄에 뒤덮인 거리는 꿈처럼 희었다. 그때 사람들이 저 매운 연기를 견디며 꾸었던 꿈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호인 작가의 작품들은 이에 대한 대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살 속에, 바람 속에 풀과 나무가 한 방향으로 휘어 있고,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간다. 한낱 사람들의 비장하고도 때론 무참한 아귀다툼이 자연과 역사 속에서 무엇인지 각성하게 하는 장면.

우리 공통의 지휘부를 겨냥하면서도, 각자의 지휘부가 누구인지 묻는 전시다. 누군가는 잇속에 눈이 먼 정치권력이나 제도의 상층부를 조준할 것이고, 누군가는 의논할 여지 없었던 상식과 관습 앞에 멈추어 설지 모른다. <지휘부여 각성하라> 전은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공간해밀톤에서 23일까지 열린다.

홍성민, 줄리엣, 2010

최민화, 하얀 유원지, 1995
Sasa44, 쑈쑈쑈_ 쑈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재활용하다, 2005
이호인, 새떼, 2010
잭슨홍, 道具에 피와 사랑을 通하게 하자, 2009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