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인생 꿈꾸는 '직장인 극단']연극하는 즐거움 느끼며 일탈의 매력에 이끌려 오늘도 연습실로

직연협 아카데미의 '분장교실'
안정적인 직장과 교외의 번듯한 이층집.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이지만,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일상은 남자를 무기력증에 빠지게 한다.

회사와 집을 기계처럼 오가던 그의 시선은 어느날 볼룸댄스 교습소에 꽂힌다. 생명력 제로의 일상은 곧 퇴근 후의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바뀌고, 주인공과 그 동료들은 인생 제2기를 맞는다.

영화 <쉘 위 댄스>에서 일상에 찌든 직장인들에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춤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나 <즐거운 인생>에서는 음악이었다. 얼마 전 '오빠밴드'나 '남격 밴드'도 이런 직장인 밴드의 활력을 다뤄 직장인들의 공감을 사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낮엔 프로, 밤엔 아마추어로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이중생활에는 '직장인 극단'도 있다. 합숙이 필요할 정도로 오랜 작업 기간과 호흡이 중요한 연극은 다른 분야와 달리 낭만보다는 고생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어두컴컴한 지하 연습실로 이끄는 매력은 무엇일까.

출구 없는 현실의 해방구, 직장인 극단

차범석 작 '산불'을 연습 중인 극단 무리
"여러분께 할 말은 다했습니다. 자, 이제 눈을 감고 공연장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운 냅시다!"

연출가의 독려에도 배우들의 표정엔 긴장감이 엿보인다. 이윽고 시작된 리허설은 처음엔 순조롭게 시작되지만, 잠시 후 잔 실수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암전이 되자 연출가는 "정신 빼놓고 있는 인간들이 있어! 대사 안 튀어나오지!" 하고 채찍을 꺼냈다. 다소 산만했던 분위기는 연출가의 호령에 다시 안정을 되찾은 듯한 모습이다.

9월 16일부터 시작되는 차범석 작 <산불> 공연을 며칠 앞두고 진행된 런 스루 리허설 현장. 비좁고 허름한 연습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들은 직장인들로만 이루어진 아마추어 극단 무리(대표 이재영)의 단원들이다. 배우들뿐만 아니라 방금 이들에게 호령한 연출가 역시 전문 연극인이 아닌 회사원이다.

아마추어들만의 연극 작업이라고 하면 학창시절의 동아리 활동이 떠오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발성이나 시선 처리는 단순히 아마추어라고 보기엔 녹록지 않은 실력이다. 다만 단원 개인의 역량이나 작업에 투자한 연습기간만큼 기량 차이가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또 다른 배우의 컨디션 난조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도 아마추어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집중도가 낮아지고 연출가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자신들도 속상한 듯 인상을 찌푸리지만, 이내 다시 즐겁게 연기에 몰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프로 극단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이 순간의 괴로움이 생계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직연협 연합공연 '날 보러 와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사연이 다른 만큼 단원들의 직업군도 천차만별이다. 교사, 간호사, 디자이너, 사회복지사, 주부. 도 있다. 순수하게 연극을 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극단 관계자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전업 연극인이 되기 위한 과도기로 극단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직장인 극단은 지금의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설명이다.

이날 리허설에 배우로 참여하고 있던 이재영 대표도 마찬가지다. '극단 대표'라는 거대한 직함을 갖고있지만, 그도 연습실에 오기 전까지는 모바일 콘텐츠 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일 뿐이다. 2004년 극단에 들어와 올해로 벌써 6년째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여기서 다 잊어버린다"고 털어놓으며 "중간에 잠깐 극단 생활을 쉰 적이 있는데 주변에서 짜증이 늘었다고 원성이 자자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지난 7월 입단한 예비단원 임미현 씨(32, 초등학교 교사)는 "학교에만 있다 보니 나에게 고정적인 이미지가 생겨버렸는데, 이곳에서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며 "이것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벌써부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체계적인 운영으로 '학예회' 편견 극복

하지만 의욕이 넘칠수록, 그리고 더 나은 단계를 원할수록 직장인 극단 생활에도 어려움은 있다. 업무와의 병행은 가장 기본적인 걸림돌이다. 극단 생활이 단순한 취미에 그친다면 즐거움뿐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봄날연극축제의 개막을 앞두고 직연협이 현수막으로 홍보를 하고 있다.
직장의 특성이나 업무에 따라 퇴근이 늦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극단에 못 올 경우도 생긴다. 미혼들은 연애도 해야 하고 결혼 후에는 아무래도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호기심에 극단을 찾은 신입 단원들은 대개 2~3년 안에 극단 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극단 생활을 하다 보면 겪게 되는 어려움은 이들의 연극을 '학예회' 수준으로 보는 외부의 편견이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의 제한된 시간 안에 연출력과 연기력을 연마하고 무대에 올리는 과정은 프로들의 작품만 봐온 일반 관객들로서는 어설프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직장인 연극인들은 오히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뤄낸 자신들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하고, 또 체계적인 운영 체계를 갖춰 자신들의 기량을 아마추어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극단 무리의 경우 대표와 부대표 아래 사무국을 두어 극단을 관리하고, 교육 프로그램으로 단원들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교육부, 극단 홍보와 카페 회원을 관리하는 홍보부, 재정을 관리하는 회계부 등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단원 관리의 경우 정단원 밑에 휴식단원, 가족회원, 신입단원, 예비단원 등을 둬 단계별 운영을 시행 중이다.

특히 극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예비단원들을 위해 극단 측은 공연 참여에 앞서 연극 작업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훈련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아카데미를 거치고 있는 예비단원 홍동규 씨(30, 유치원 교사)는 우선 음향 파트를 맡으며 극단에서 첫 임무를 맡았다.

동화작가의 꿈을 가진 그는 작법의 이해를 위한 연출기법을 알기 위해 극단을 찾았다. "입단 당시 개인적으로 힘든 시절을 겪었다"고 털어놓은 그는 극단 생활을 통해 그런 부분들이 많이 해소됐다며 "또 하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생활이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극단 일상탈출의 '천형' 연습 장면
아마추어 이상의 아마추어를 향해

꿈이 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멍한 가슴으로 사는 사람들의 사연은 인터넷에 몇 글자만 쳐봐도 쉽게 나온다. 뒤늦게 꿈을 향해 돌진하는 직장인들의 노력은, 그래서 더 뜨겁고 치열하다. 연극이 좋아 극단을 만들었던 이들은 그렇게 함께 작업을 해 공연을 올리고, 때로는 더 많은 것을 향유하기 위해 연대하기도 한다. 그 결실이 바로 '전국 직장인 연극단체 협의회(이하 직연협)'이다.

직연협은 1978년 창단한 전통의 극단 아해를 비롯해 연극패 청년, 극단 무리, 극단 틈새, 극단 일상탈출 등 정회원 10개 극단, 준회원 3개 극단 350여 명의 직장인들이 모인 순수 직장인 연극단체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이면, 만남 그 이상의 시너지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것이 매년 매년 4~5월에 직연협 소속 극단들의 릴레이 공연으로 이루어지는 '봄날연극축제'다. 또 '연합'이라는 성격에 맞게 2년에 한 번씩은 각 극단이 참여해 공동으로 제작하는 직연협 연합공연도 펼쳐진다. 관객들이 보기에 학예회 수준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문 강사를 초빙해 연극 전반에 대해 공부하는 직연협 아카데미도 정기적으로 주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직연협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해서 다른 직장인 극단들이 소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연협 극단들을 비롯해 전국의 모든 극단들이 참여하는 축제도 있다.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이 주최하는 근로자연극제가 그것이다.

직연협 연합공연 '오랑캐여자 옹녀'
지난 8월 21일, 인천아트홀 소품 무대에 오른 극단 잡놈의 <그 여자의 소설>을 시작으로 제31회 근로자연극제가 막을 올렸다. 이번 근로자연극제는 전국에서 총 29개 직장인 연극단체(서울 23팀, 지방 6팀)가 참가해 9월 19일까지 한 달에 걸쳐 서울 포함 7개 지역에서 치러지게 된다. 몇 년 전부터 대상을 나눠갖고 있는 극단 아해와 극단 일상탈출 등의 경합이 예상되는 가운데 극단 무리의 <산불>도 가세해 아마추어 이상의 실력을 뽐내게 된다.

하지만 직장인 극단의 단원들이 이런 연극제에서 얻는 가장 큰 수확은 수상이나 그 산물인 상금이 아니다. 그리 많지 않은 상금은 그대로 극단 운영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수상을 떠나 참가를 위해 땀 흘리며 연극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이미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두근거리는 일탈의 매력에 이끌려 그들은 그렇게 오늘도 허름한 연습실로 향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