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200% 즐기기][Story in the Kitchen] (8) 송편시어머니, 며느리, 손녀 3대 떡 만드는 모습 절로 생각나네

특정한 날 먹는 음식은 그날의 정서를 압축한다. 스위스인들이 설날에 먹는 퐁듀는 그들이 유목민의 후예임을, 한때 가난과 추위를 겪은 약소국의 국민이었음을 드러낸다.

추수감사절 미국인이 먹는 칠면조 구이는 수확의 풍요를 축복함과 동시에 앞으로 그들의 수확이 살벌한 살육의 과정을 통해 이룩될 것임을 암시한다.

송편은 추석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쌀을 빻고 콩과 깨와 밤과 팥을 넣어 솔잎과 찐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 기반이 농경이었음을 드러낸다. 시어머니부터 며느리와 손녀까지 3대가 동원되어 송편 빚는 추석 풍경은 이 농경이 또한 가부장제 대가족을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추석만큼이나 송편의 기원은 오래됐다. 문헌을 보면 고려 때까지 기장으로 송편을 빚다가 조선시대 들어 쌀로 송편을 빚는 풍속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 모양새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 <규합총서>에 소개된 송편 빚는 법을 보자.

'흰떡을 골무떡보다 눅게 하여 쪄서 채를 친다. 굵은 수단(水團, 멥쌀가루로 친 흰떡을 썰어 녹말가루를 묻혀 찬물에 헹궈 꿀이나 오미자물에 띄워 먹는 화채)처럼 가루를 묻히지 말고 비벼 그릇에 담고 떼어 소가 비치게 파고, 팥에 꿀을 달게 섞고 계피, 후추, 말린 생강가루를 넣어 빚는다. 너무 잘고 둥글지 않게 버들잎 같이 빚어 솔잎을 켜켜로 얹고 찌면 맛이 유난히 좋다.'

농경사회를 넘어 근대와 현대를 겪어내며 추석이 살아남은 것처럼, 송편은 그 모양을 간직한 채 살아남았다.

농경사회 대가족의 풍경

밀가루 가격이 폭등하면, 빵집 앞에서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해외뉴스에서 보게 된다. 빵을 주식으로 삼는 민족은 왜 빵을 제 집에서 만들지 않고, 빵집에서 사먹을까? 이해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규모의 경제가 삶의 수준을 끌어올리진 못해도,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빵을 가게에서 사먹는 것처럼, 우리도 떡을 떡집에서 사먹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호기심은 공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송편만은 예외다. 대다수 한국인이 송편만은,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빚어야 제 맛을 낸다고 생각한다. 미디어가 드러내는 이미지는 그것이 실제 그렇든, 그렇지 않든 그 시대 사회통념을 보수적으로 나타내는데, 추석이면 신문과 방송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3대가 모여 송편 빚는 모습'은 우리사회가 추석에 대해 규정짓는 모습이 아직도 가부장제 대가족으로의 회기임을 드러낸다.

때문에 실제 떡집에서 송편을 사먹더라도, 우리는 집에서 손으로 빚어내는 것이 제대로 된 송편 맛을 구현할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다. 이왕이면 3대가 모여서.

그런 점에서 송편이 옛 모양을 간직한 것처럼, 우리 머릿속 송편을 빚는 풍경 또한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김삿갓은 '송편시(松餠詩)'에서 추석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손에 넣어 굴리고 굴려 새알을 빚더니/손가락 끝으로 낱낱이 조개 입술을 맞추네. /금쟁반 위에 봉우리를 첩첩이 쌓아올리고, /옥젓가락으로 집어올리니 반달이 떠오르네.'(手裡廻廻成鳥卵 指頭個個合蚌脣 金盤削立峰千疊 玉箸懸燈月半輪)

수 백년이 지나 가수 안치환은 그 풍경을 이렇게 재현했다. 노래가 발표된 때가 1995년이라 하니 이때만 해도 우리의 추석 풍경은 수백 년 동일한 모양새였나 보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송편 빚는 며느리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시간은 흘러가는데 / 적적하던 내 고향집 오늘은 북적대지만 우리 모두 다 떠나면 얼마나 외로우실까 / 또 우실지 몰라' (안치환 작사·작곡·노래 '고향집에서' 3절)

추석이 변하듯 송편 맛도 변한다

이렇게 수백 년을 이어온 송편의 맛은 불과 15년 만에 다이내믹하게 변했다. 송편의 맛보다 송편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육수와 화학조미료 맛도 구분 못하는 현대인이 방앗간 송편과 손 송편 맛을 모양 아닌 맛으로 구분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니 옛 송편 맛에 대한 그리움은 기실 옛 추석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다.

도시에서 태어난 노동인구들은 이제 찾아갈 시골이 없고, 추석이면 3대가 모였던 큰집에는 '형편 되는 친척들'만 오고간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은 그렇게 믿고 싶은 의지일 뿐,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공선옥의 단편 '비오는 달밤'은 그 풍경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은 집에서 혼자 추석을 맞을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며 묵묵히 송편을 빚는다.

시숙과 시동생이 다툼을 하고, 큰 동서와 동서가 다투고, 성이 다른 동서의 아이는 서러움에 겨워 싸움을 걸고 시어머니는 '당신이 쥑일년'이라고 한탄한다. 이 와중에 유일하게 대학 나온 남편은 여전히 리모컨만 돌리고 있다.

'6자회담의 주인공들에게 경수로 제공여부, 핵이용권의 확보가 관건이듯이, 내게는 지금 송편, 송편만이 유일무이한, 절체절명의 과제인 것이다. 나는 입 속으로 소리 안 나게 아, 송편!을 한번 부르짖었다. 내가 시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입다물고 송편을 빚고 송편을 찌고 송편을 접시에 담아내는 일뿐이다.'

송편이든 만두든 명절 음식을 만들 때 멤버는 할아버지-아버지-손자가 아니라 할머니-어머니-손녀로 구성되야 구색을 갖춘 것 같다. "예쁘게 잘 빚어야 예쁜 자식 낳는다"는 말은 이 송편 빚기가 단순한 육체노동이 아니라 감정노동까지 가산되야 하는 것임을 은연중에 압박하는 수사다. 왜 명절에는 육체와 감정 노동이 착취되야 하는 걸까?

김혜순 시 '레이스를 뜨는 여자'에서 송편 빚기는 이런 사회 통념을 상징한다. 참고로 이 시는 프랑스 68세대 지식인 파스칼 레네가 쓴 소설 '레이스 뜨는 여자'와 동일한 제목이다. 이 소설은 사회 속 여성의 위상 문제와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혜순의 시는 이 연장선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송편을 찌다가/ 떡 반죽을 두 손으로 마구/ 짓뭉개고/ 침을 탁 뱉고/ 마구 내던지고 싶다가도/ 형형색색의 가지런한 송편'

폭력적 욕망이 속에서 들끓고 있지만 화자는 결국 현실의 공고한 질서 앞에 '가지런한 송편'이 되고 만다. 저항은 마음 속에 일다가 맥없이 꺼지는 거품 같은 것이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과 제도 속에 화자가 숨 쉴 공간은 없다. 화자는 오랜 시간 그렇게 길들여졌고 암묵적 강요 속에 오직 순종의 미덕만을 취할 가치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김혜순의 냉소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시 속의 화자는 여자나 남자로 규정되지 않는다. 여자만 명절증후군을 겪는 건 아닌 것처럼, 사회 통념에 희생되는 것은 여자만이 아니다.

추석이 변하듯 송편 맛도 변한다. 우리 머릿속 아련한 추석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추석과 같은 모양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송편 맛'은 언제나 그리움의 형태로만 존재할 것이다. 맛은 육신과 정서에 사무친 기억이므로.

'내일 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째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 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내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등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반죽을 주무르며 손이 되어 떡을 빚고 싶은지 모른다.'
(백석 '고야(古夜)' 중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