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산사나무 아래>서 <카멜리아>까지 세계적 은막의 축제 리뷰

매년 10월 초 해운대 백사장에 레드카펫 위 배우들보다 더 빛나는 날씨가 펼쳐진다는 것을 방방곡곡 알려온 전령사,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도 지난 7일부터 15일까지 열렸다.

인터넷 예매가 시작된지 역대 최단 시간인 18초만에 매진된 장이모 감독의 <산사나무 아래>로 막을 올려 세 명의 아시아 감독이 부산을 배경으로 만든 사랑 영화 <카멜리아>로 작별을 고한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돌아 봤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닌, 거장과의 만남

올해도 수많은 거장들이 부산을 찾았다. 그중에는 다시는 한국에서 만나지 못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배우 윌렘 데포와 김지미, 줄리엣 비노쉬, 감독 올리버 스톤과 카를로스 사우라, 의상 감독인 와다 에미가 핸드 프린팅 행사를 가졌다.

마스터 클래스 프로그램에서는 장이모와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 촬영감독인 마크 리, 와다 에미의 영화 인생이 공개됐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은 각자의 영화에 줄리엣 비노쉬를 캐스팅 했던 인연으로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개막작 김태용 감독의 <만취>(위)와 폐막작 <카멜리아>(아래)
이중 거장들에게 직접 영화의 뒷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스터 클래스 프로그램은 관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감독들의 영화 인생은 곧 각자의 시대와 사회에 대한 증언이기도 했다. 지난 11일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한 스페인의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은 악명 높은 프랑코 독재 정권 당시 만든 정치적 영화로 존경을 받게 된 인물. 정치적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시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비결에 대해 그는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는 점도 한 이유지만,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스페인 문화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홍보 하러 삼만 리, 부산을 찾은 세계 영화

명성이 높아진 만큼, 부산국제영화제는 나날이 세계 영화계의 치열한 홍보의 장이 되고 있다. 캐나다와 호주, 러시아, 체코, 이탈리아 등 15개국 정부와 영화 관련 기관들이 자국 영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행사를 열었다. 10일 열린 '태국영화의 밤'에는 우볼라타나 라자칸야 공주가 몸소 행차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행렬에 지도에는 없는 국가도 참여했다. 바로 쿠르드다. 유랑민족인 쿠르드족 자치정부인 쿠르디스탄 정부는 '쿠르드 시네마 특별전'을 열고 전통예술 공연도 선보였다. 쿠르드 영화가 중요한 것은 민족의 비극적 역사에 저항해 온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들려주는 유랑의 경험은 국경의 의미가 재편되고 이주가 보편화된 오늘날 세계에 중요한 교훈이 되기도 한다.

지난 11일에는 쿠르드 영화의 의미를 짚어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쿠르드 시네마, 지배당하지 않는 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세미나에서 쿠르드족 출신 감독들은 자신의 영화가 놓인 불안정하고도 예민한 자리에 대해 고백했다. 쿠르드인에 대한 핍박이 심한 터키의 쿠르디스탄 지역을 배경으로 한 <디야르바키르의 아이들>의 미라즈 베자르 감독은 "어릴 때 독일로 이민을 갔지만 결국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쿠르드 언어로 쿠르드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배우 줄리엣 비노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함께 한 오픈 토크 '그들은 함께 하였다'
쿠르드 저항군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전사 다비드 톨히단>의 마노 카릴 감독은 쿠르드 남자가 쿠르드로 가는 여정을 담은 자신의 전작이 스위스와 싱가폴에서 "테러리즘을 자행하는 영화"라는 터키 대사관의 항의로 상영 취소되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쿠르드 영화는 그 자체가 정치적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돌아본 인간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 그 점이 감동을 이끌어낸다. 조영정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쿠르드 영화에 대해 결국 놀라게 되는 이유는 이 영화들이 희망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인간애를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고 말했다.

한국영화 중간 점검, 과거와 현재

국제영화제이긴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는 매년 한국영화를 총정리하고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올해에는 배우 김지미를 통해 한국영화의 과거를 회고해보는 프로그램과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고 곽지균 감독을 추모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중요한 감독들의 신작도 공개됐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임순례 감독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으로 부산을 찾았다. 제목 그대로 두 남녀와 소가 함께 길을 떠나는 로드 무비로, 전작들에서처럼 잘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격려가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소는 구도의 상징이다. 동물과의 공존을 담았다는 점에서 환경 영화로 볼 법도 하다.

'한국영화비평의 회고와 반성, 위기의 진단, 미래를 향한 전망' 세미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은 멜로 영화 <만추>를 선보였다. 이만희 감독의 1966년작을 리메이크한 영화로 감옥에 있던 여자가 잠깐 특별 휴가를 나왔다가 한 남자를 만나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주된 내용이다. 김태용 감독은 배경을 미국 시애틀로 옮기고 중국인 여자와 한국인 남자의 만남과 이별을 그렸다.

시애틀의 안개와 정취는 화면의 촉감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고, 언어의 문제가 끼어들면서 대사는 함축되었다.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은 여자와 정착할 곳도, 더 갈 곳도 없는 남자 사이의 짧지만 인상적인 동행에 대한 기억은 여운이 깊다.

고민에 빠진 영화 비평은 어디로

매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을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영화제는 나날이 성황인데 왜 비평 문화는 위기인 것일까. 진지하고 열성적인 관객이 이렇게 많은데 왜 영화에 대한 담론은 나날이 얕고 좁아지는 것일까.

한국영화평론가협회는 이런 고민을 공유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지난 10일 마련된 '한국영화비평의 회고와 반성, '위기'의 진단, 미래를 향한 전망'이 그것이다. 발제자들은 한국영화비평의 환경이 달라졌다는 점에 동의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는 "영화 <디 워> 이후 대중비평의 시대가 왔다. 전문비평의 권력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나는 김동호 집행위원장
매체 기술의 발전, 관객의 인식 변화 등으로 도래한 이 새로운 시대에 평론가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소통의 저변을 확대하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물론 스마트폰 같은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글쓰기 이외에도 영상물을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일 등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민아 영화평론가는 같은 맥락에서 얼마전 영국 가디언지가 웹상에서 진행했던 실시간 영화 평론 프로젝트를 소개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방송하면서 영화평론가와 학자가 실시간으로 해석을 '달아주는' 방식이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영화비평의 역할도 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수준 높은 영화 담론이 안정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매체에 대한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 사람, 혹은 한 시대의 아름다운 뒷모습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트레일러에는 배우도 감독도 아니지만 영화팬들에게 낯익은 얼굴 하나가 등장했다. 바로 영화제의 살림꾼 김동호 집행위원장이었다. 많은 영화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영화제를 떠난다. 그의 영화인생에 대한 애정 어린 헌사가 영화제 틈틈이 곳곳에 마련되었다.

지난 15년간의 영화제 여정을 담은 사진전 '김동호와 친구들'이 열렸으며, 해운대 바닷가에는 매일 밤 김동호 위원장과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예술포장마차'가 들어섰다. 그래도, 그래도 아쉬운 이들을 위해 김동호 위원장은 마지막 팬 서비스를 잊지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를 꾸리며 다녔던 전세계 영화제에 대한 기록을 엮어 책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를 낸 것. 이는 영화제에 기행문인 동시에 한국영화가 세계와 만나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는 김동호 위원장의 퇴임으로 한 시대를 마무리하며, 끝났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