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ㆍ영화ㆍ연극ㆍ뮤지컬 등 대중 호기심 자극 흥행 성공

양아치의 '밝은 비둘기 현숙 씨'
"제목부터 시작하는 소설과 나중에 제목을 붙이느라 고생하는 소설이 있는데 이 작품(장편 <1Q84>)은 처음에 제목밖에 없었다."

일본 계간지 <생각하는 사람> 여름호(국내에는 <문학동네> 가을호에 소개)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는 작품에서 제목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목은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바로미터다. 동시에 작가의 취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책 장사, 영화 장사 절반은 제목"이란 말처럼, 제목은 문화예술 작품을 대중에게 알리는 서막으로 쓰인다. 대중이 맨 처음 책과 영화, 연극과 뮤지컬을 만나는 게 제목과 표지, 포스터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제목 하나로 베스트셀러

'무슨 영화를 볼까? 어떤 소설을 읽을까?'를 고민할 때 잘 지은 제목 하나는 대중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30만 부 이상이 팔린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원제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었다. 작가가 이 제목을 고집했지만, 편집자가 작가를 설득해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제목에 노골적인 표현이 들어가면 안 팔린다는 게 출판사 영업부의 판단이었어요. 독자가 책을 갖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봐야 하는데, 표지에 노골적인 표현이 있으면 들고 다니기 민망하다는 거죠. <마지막 섹스의 추억>도 마찬가지라서 편집회의 때 작가를 설득했는데, 그때 최영미 시인이 "창비는 섹스도 안 하고 사냐?"고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창비에서 근무했던 관계자의 말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함께 90년대, '전설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원제를 바꿔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 1988년 저작권 계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3개 출판사가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으로 출간했지만, 국내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듬해 출판사 문학사상이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꿔 재출간하면서 첫해 30만 권이 나가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목에 얽힌 대표적인 에피소드 2가지를 소개했지만, 출판계는 물론 영화와 연극계에서도 이런 사례는 수두룩하다.

내공의 압축판

'작품을 쓸 때도 나는 서사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콘셉트를 먼저 떠올리고 거기에 이야기를 붙여나가요. 일단 제목부터 정하고 출발하죠. 예를 들어 '죽도록 달린다'는 계속 달려 보자, '왕세자 실종사건'은 왕세자가 실종된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 그 다음에 내용이 나오는 식이죠.'

(김옥란·김주연, <우리시대 극작가> 극작가 한아름 인터뷰 중에서)

창작자들은 제목을 '자식 이름'에 비유한다. 아이의 이름에 부모의 성정과 취향, 자식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 담기듯, 제목은 창작자의 개성을 담고 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회화식 아줌마 입문', '밝은 비둘기 현숙 씨'. 얼핏 암호나 광고 문구 같은 이 말들은 사실 모두 작품의 제목이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는 박민규의 단편소설, '회화식 아줌마 입문'은 윤성호의 단편영화, '밝은 비둘기 현숙 씨'는 양아치의 미디어아트 작품 제목이다.

제목만 봐도 창작자의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품의 주제를 압축하고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도 제목이다.

뮤지컬 <왕세자 실종 사건>
세상 모든 존재는 이름을 통해 소통의 관계를 맺는다. 제목은 작품의 방향, 작가의 내공과 시장의 취향을 드러내는 바로미터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