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위한 행사' 아닌 장기적 '예술 나눔' 새로운 시도들

한예종 예술봉사 프로젝트
영화 <이퀄리브리엄>의 배경은 감정이 없는 사회다. 인류를 멸망의 위기를 몰고 가는 전쟁의 원인이 욕망와 시기, 분노 등 인간의 감정에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정부당국과 지배자들은 감정을 증폭시키는 예술작품들을 보이는 대로 불살라 버린다.

하지만 로봇 같던 사람들이 다시 인간답게 돌아오는 계기는 역시 예술이다. 여기서 영화는 무엇이 인간의 요건인지 말해준다. 또 영화는 예술이 담고 있는 것이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을 바꾸는 예술의 힘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지난해 개봉한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는 현실에서 실제 일어난 예술의 기적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된 베네수엘라 아이들의 삶이 예술을 통해 변화되는 과정은 말 그대로 기적 같은 감동을 보여준다.

또 콜롬비아의 엘 콜레지오 델 쿠에르포(몸의 학교) 역시 사회적으로 소외된 빈민층 아이들에게 무용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또 하나의 기적의 사례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에 비하면 국내에서 예술은 그 사회적 역할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주로 클래식 예술가들이 주도해온 '예술 나눔' 행사는 사회 소외 계층에게 예술을 '나누어준다'는 콘셉트로 이들을 공연장에 초청하거나 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공연을 해왔다. 기업에서는 문화마케팅의 일환으로 일명 '찾아가는 메세나' 사업 등을 통해 예술을 통한 문화적 불평등 해소의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 중
하지만 이런 양상은 근본적인 계층 간 문화적 격차를 좁히기에는 한계가 있다. 예술가나 관련 단체들의 나눔 행사는 문화 소외 계층이 해당 장르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나 경험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개 '행사를 위한 행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일 년에 한 번 정도의 연례행사는 공연자나 관람자 모두에게 단순한 이벤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또 기업의 문화 관련 행사는 공공적 성격보다는 이미지 제고를 위한 마케팅 이벤트에 그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로 예술 나눔을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서울시와 부산시, 경기도 등 지자체를 비롯해 공립, 구립 문화예술단체에서 '착한 예술'을 지향하는 프로젝트들을 가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프로보노(pro-bono)도 사회와 기업의 변화된 관심을 반영한다. 프로보노는 원래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시민들이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면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로 확대되며 '재능기부'의 의미까지 포함하게 됐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이런 흐름을 반영해 2011년 문화 분야 주요 트렌드의 첫 번째로 '착한 예술'을 꼽았다.

서울문화재단은 서울시복지재단과 함께 저소득층 청소년을 위한 예술교육 지원을 시행하고 있다. 부산시와 부산문화예술교육연합회 역시 장애인에 대한 문화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경기도 문화의 전당과 도립예술단은 도내 재래시장을 돌며 '찾아가는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트러스트무용단 '찾아가는 춤 공연'
세종문화회관은 공연장의 특수성을 활용해 사회 소외 계층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음악교육을 하는 한국의 엘 시스테마를 꿈꾸고 있다. 서울 구로구 역시 서울시향과 함께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오케스트라 교육을 함으로써 세종문화회관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한편 민간을 주축으로 이뤄지는 '착한 예술'의 활동들도 적지 않다. 2008년 개설된 아티스트 인터넷 후원 모임인 '아티스트 팬클럽'은 평범한 인터넷 카페를 넘어 미술작가들의 이익 창출을 돕는 사회적 기업을 지향하고 있다.

지난해 회원들이 각자 기증한 물건들을 파는 '착한 경매'를 통해 기금을 조성해 미술 작가들의 첫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던 이 모임은 젊은 작가들의 전시 기회 확대를 위해 '찾아가는 버스 미술관' 프로젝트도 추진할 정도로 열성적이다.

성남 지역 시민들이 중심이 된 '사랑방 문화클럽'은 2007년 시작돼 벌써 4년째를 맞은 사회공헌 공간이다. 발족 당시에는 성남문화재단이 마련한 시스템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150여 개의 동아리에서 4000여 명이 활동할 정도로 성장해 자발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위문공연이나 자선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예술단체들도 공공재로서의 예술의 의미를 되새기는 활동을 보이고 있다. 1997년부터 소외지역과 계층에 대한 공연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는 트러스트무용단은 지난해 복권기금 문화나눔사업지원의 일환으로 서울, 경기 지역의 새터민과 외국인노동자와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찾아가는 춤 공연' 프로젝트를 기획해 시행하고 있다.

몽골에서의 한예종 예술교류봉사 활동
무용단 관계자는 "2010년은 특히 탈북자와 다문화 가정과의 춤 예술을 통한 소통의 방법들을 작품 속에 녹여낼 수 있었다"고 돌아보며 "참여하는 문화소외층을 대상화시키지 않고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춤을 통한 소통과 치유 그리고 나눔이라는 예술적 가치들을 높일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한편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매년 두 차례 방학 시즌마다 교수와 학생들로 이루어진 예술교류봉사단을 국내외 문화 소외 지역에 파견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처음 시작된 이 사업은 현지의 낯선 환경을 체험하며 예술가로서 가진 재능을 적용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는 '봉사'가 어우러진 교류 프로그램이다. 이제까지의 예술 나눔 행사가 사실상 예술가들의 일방적인 기부에 그쳤다면, 이 프로그램은 실질적인 나눔의 의미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첫 행선지였던 인도 뉴델리에서 봉사단은 네루대 한국어학과 재학생들과 함께 한국어 연극과 합창 공연을 하고, 현지 저소득층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예술봉사활동을 펼쳤다. 팀장을 맡았던 연기과 전문사 과정 정주아 씨는 "인도 아이들을 통해 우리는 예술은 진정한 나눔이라는 것을 느꼈다. 봉사는 내가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주고 받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얼마 전 나온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장하준 교수는 좋은 사회란 일부 계층에게 집중된 자본의 양으로 전체 평균을 낸 부자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상류층에만 집중된 부는 중간층 이하로 고르게 내려오기 어렵다는 것. 그래서 그는 부가 밑으로 내려오게 하는 강력한 펌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전제로 자본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바뀌어야 함은 당연하다.

이를 예술 환경에 대입시켜도 그 맥락은 비슷하다. 예술은 일부 계층이 독점하다 여유가 생기면 '나누어주는' 문화자본이 아니다. 함께 교류하고 만들어가는 사회적 공공재다. 그런 점에서 착한 예술은 이제 '선심성 행사'나 기업의 마케팅 수단이 아닌,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의미 있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