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신진 디자이너 최지형과 홍혜진의 여성수트 이야기

존재하는 모든 옷 중 가장 정교하다

수트(suit)는 기본적으로 인체를 찬양한다. 반듯한 어깨, 탄탄한 가슴, 날렵한 허리, 팔 상완에서 하완으로 이어지는 관능적인 굴곡. 이상적인 남자의 몸을 구현하기 위해 테일러(tailor)들은 수많은 구성선과 심지, 부자재들을 총동원해 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트는 여타의 다른 옷들과 달리 스스로 존재한다. 사람이 입었을 때에야 비로소 형태가 완성되는 셔츠나 바지와는 다르게 수트는 마치 데드 마스크처럼 소름 끼치게도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다.

상체를 모방한 이 단단한 갑옷은, 선천적 이유든 후천적 이유든 완벽한 몸을 소유하지 못한 남성들에게는 희소식이다. 좁은 어깨, 튀어나온 배, 굽은 등, 가슴과 허리의 군살은 이상적으로 지어진 폼 안에서 남 모르게 웃을 수 있다.

물론 대가가 따른다. 어깨의 패드는 팔의 거침 없는 움직임을 방해하고, 신축성 없는 소재는 시종 몸을 압박하며, 단추를 채웠을 경우 하루 종일 배를 내미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남자로 만들어주는 대신 신사답게 행동하라는 수트의 메시지 때문에 대부분의 공식석상과 격이 필요한 자리에서는 수트를 유니폼으로 채택한다.

그럼, 여자가 입었을 때는 어떨까? 가슴이 가려진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불룩한 가슴이 자아내는 수많은 상상을 수트는 정중하게 가로막는다. 여리고 동그스름한 어깨마저 각지고 단단하게 변하고 나면 남자들의 탄식이 들려온다. 남아 있는 여성성이라고는 허리뿐인데 허리의 섹슈얼리티는 확실히 가슴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수트에 감싸인 여자의 늘씬한 허리는 의존이 아닌 힘을, 무기력함이 아닌 바짝 선 긴장감을 표출한다. 수트 입은 여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태도는 당당함과 책임감, 그리고 경쟁력 확보를 위한 섹시함이지, 교태나 울먹거림이 아니다.

지금 여자에게 필요한 건? 당당한 섹시함

지난해 10월 치러진 2011 춘하 서울패션위크는 유례 없는 성황이었다. 정부가 건국 이래 최초, 최대 규모로 쏟아 부은 패션계에 대한 지원 덕에, 마침 10주년을 맞은 서울패션위크는 흥에 겨웠고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최지형 서울패션워크 10 F/W
해외 디자이너가 초청되고 반대로 국내 디자이너들이 해외로 나가기도 했으며 주최측이 그토록 부르짖던 해외 바이어들의 수주도 다소나마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변화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진 디자이너들이 보여준 흥행성이었다. 과거 국내 패션 디자이너들이 천재적 카리스마와 장인 정신으로 옷을 만들고 대중과의 소통 부재에 허덕이면서도 이를 디자이너의 숙명으로 여겼다면, 젊은 디자이너들은 완벽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한 채 당장이라도 입고 거리로 나갈 수 있는 옷들을 선보였다.

그들의 쇼를 보러 온 사람들은 관중이기 보다는 고객에 가까웠다. 장윤주, 공효진, 류승범 등 내로라하는 패셔니스타들도 베테랑 디자이너 대신 경력이 3년도 채 되지 않는 디자이너들의 쇼를 찾았다.

해외 유학파, 30대, 도시적이고 웨어러블한 디자인, 철학에 상업성을 연결시키는 영리함, 해외 바이어들로부터의 찬사, 대중과의 유연한 소통. 주목받은 신진 디자이너들에게서 보여진 공통점이다. 여기에 여성복을 만드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만 보여진 공통분모가 또 하나 있으니, 바로 공교롭게도 수트를 시그너처 아이템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동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는 그들의 예리한 눈썰미를 신뢰한다면, 지금 한국이 원하는 것은 점퍼도, 카디건도 아닌 수트 입는 여자의 당당함이다. 부상하는 한국 패션의 현재를 대변하는 디자이너 2인이 자신의 수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최지형 서울패션워크 11 S/S
쟈니 헤잇 재즈, 최지형 Johnny hates jazz

"수트는 가장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옷이에요. 패턴, 원단, 봉제가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죠."
디자이너 최지형은 2011 춘하 서울패션위크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지난해 초 정부의 글로벌 디자이너 육성 프로젝트 'Seoul's 10 Soul'에 뽑혀 파리 트라노이 박람회에 참가했고, 유럽 언론의 뜨거운 반응과 함께 에르메스 버킨 백의 주인공인 제인 버킨의 극찬을 받았다.

이어서 지난해 말에는 'Seoul's 10 Soul' 프로젝트의 최우수 디자이너로 선정돼, 2011년 한 해 동안 파리에서 컬렉션을 진행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게됐다. '쟈니 헤잇 재즈'는 이 젊은 디자이너의 외양과 성격, 감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핫한 브랜드다.

"Johnny hates jazz(쟈니 헤잇 재즈)라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쟈니라는 남자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중성적인 느낌, 약간의 위트. 재즈의 리드미컬함에서는 유쾌함과 여성성도 느껴지고요. 이 모든 것들이 다 옷에 녹아 들어 있어요."

그녀는 패션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어머니 밑에서 원치 않는 공주 복장을 하며 남몰래 반항심을 키워 왔다. 그것이 축적되고 폭발해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하는 쟈니 헤잇 재즈를 만들었고 여자들은 이 적당히 조절된 여성성에 열광했다. 그 중에서도 수트는 브랜드의 대표 아이템이다.

사진=임재범 기자
"수트는 남자의 몸을 잘 보완하면서도 드러내는 옷이에요.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여자가 가진 아름다운 곡선에 직선의 수트가 입혀졌을 때 일어나는 대비는 상당히 흥미로워요. 그 대비가 여자의 태도를 자신감 있고 파워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뮤즈가 바로 그런 당당함을 가진 여자인데, 여전사 같은 과장된 강렬함보다는 수트 입은 여자의 자신감이 딱 적당해요."

그 스스로 내면에 아저씨가 들어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최지형에게 남성성은 중요한 디자인 모티프다. 남성 테일러링에 쓰이는 플랩 포켓을 큼직하게 만들어 여성용 재킷에 넣기도 하고 박시한 베스트를 선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마른 남자들 중에서 쟈니 헤잇 재즈의 옷을 사가는 경우도 꽤 된다.

"디자인적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하지만 늘 웨어러블함과 클래식함을 유지하려고 해요. 디자인이 요란하면 1년만 지나도 싫증나는데 그럼 너무 안타깝잖아요. 모직 코트의 소매를 가죽으로 했다면 색깔을 통일하고, 색을 다양하게 썼을 경우 원단을 통일하는 식으로 절제하려고 노력해요. 특히 수트에 있어서는 반드시 기본 실루엣을 지켜요. 수트는 기본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옷이기 때문에 입었을 때 편하기가 쉽지 않아요. 편안하면서도 힘이 있어 몸매를 잡아 주는 그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좋은 수트의 핵심이죠"

더 스튜디오 케이, 홍혜진 The studio K

"수트의 생명은 브이 존과 단추의 간격에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 홍혜진은 4년 전 '더 스튜디오 케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복을 론칭했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남성복 '라 피겨라'를 만들었다. 남성복을 론칭한 이유는 소재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소재 싸움이라 불릴 만큼 원단의 퀄리티가 중시되는 남성복에서만 볼 수 있는 질 좋은 모직은 홍혜진을 완전히 매혹시켰다.

홍혜진 서울패션워크 11 S/S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 좋은 옷인 것 같아요. 소재가 좋고, 봉제가 튼튼하게 잘 돼 있고, 베이식해서 질리지 않는 디자인이요. 그래서 남성복뿐 아니라 여성복에도 남성복 소재를 자주 사용해요. 남성복에 쓰이는 소재들은 질이 좋고 내구성이 강하고 축축 쳐지지 않아서 구조를 만들기에 좋거든요."

여자의 재킷이 어느 정도 몸을 타고 흐르는 성질이 있는 반면 남자의 수트 재킷은 마치 종이 포장지처럼 몸과 약간 떨어져 스스로 형태를 유지한다. 그녀는 바로 이 점에 열광하며 여자의 옷에 그대로 대입시켰다. 튼튼한 울과 빳빳한 옥스퍼드 천, 치노 팬츠에 쓰이는 두꺼운 트윌 면으로 드레스와 재킷을 만들고, 여기에 턱시도 라펠이나 남성 셔츠의 깃에서 모티프를 따온 디테일을 차용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더 스튜디오 케이의 옷들은 실험적인 발상과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바로 입고 나갈 수 있을 만큼 접근성이 뛰어나 금세 상업적인 호응을 얻었다. 론칭하자마자 갤러리아 백화점에 입점했고 지난해에는 'Seoul's 10 Soul'에 뽑혀 파리 트라노이 쇼에 참가해 런던, 밀라노, 독일, 덴마크, 핀란드 등지로 팔려 나갔다.

"단순한 디자인이 좋아요. 늘 '심플 이즈 베스트(Simple is best)'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기본 폼을 유지하면서 여기에 어떻게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가미할지가 관건이죠. 고객이 당장 입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웨어러블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요."

그는 모든 옷 중에도 사람의 몸을 아름답게 구현할 수 있는 결정체는 수트라고 말한다.

"디자인을 하다 보면 가끔 욕심이 앞서는 때가 있어요. 내 세계를 강하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요. 하지만 그럴 경우 소매나 라펠은 건드릴지언정 수트의 바디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아요. 그 중에서도 핵심은 브이존에서 단추로 이어지는 부분, 그리고 단추의 간격이라고 생각해요. 단추를 여미는 부위는 수트가 입는 사람의 몸과 맞아 들어가는 지점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잡아 먹는 듯한 강한 옷을 싫어해요. 옷에 따라 사람이 바뀌는 것처럼, 옷도 사람의 분위기에 젖어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수트를 입고 단추를 잠그는 순간이 바로 그 때인 것 같아요."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