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은 무슨…난 세수하고 로션도 안 바르는데?"

12명 남짓이 모인 기업 CEO들의 연말 모임. 한 멤버의 당당한 발언에 나머지 멤버들의 눈길이 쏠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칭송이 아닌 질책이었다. "아니,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 "그러니까 피부가 그 모양이지.

" 남자의 단장,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 중년 남자의 꾸미기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 변화는 외부의 재촉이 아닌, 그들 내부의 간절한 필요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패션의 사각지대, 버려지는 유기남들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사진출처:더 사토리얼리스트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왜 꾸밀 줄 모를까에 대한 강진주 씨의 답변이다. 퍼스널 이미지 연구소의 소장인 그는 MB의 이미지 컨설팅을 포함해 40~50대의 기업 오너와 전문 경영인들에게 패션과 뷰티 전반에 걸친 조언을 해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 남자들은 늘 여자들에 의해 '입혀지는' 입장이다. 20대 초반까지는 그 여자가 엄마이고, 그 후에는 애인으로 바뀌며, 바로 아내에게 바통 터치된다. 그리고 첫 아이가 태어나는 30대 중반, 드디어 남자는 난생 처음으로 버려진다.

"40대 이상의 임원들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아침에 사모님이 의상을 정해주는 경우가 전체의 10% 미만으로 드러났어요. 그러면 이들의 가장 가까운 의상 조언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양복 가게 점원이에요. 한국 남자의 90% 이상이 판매원의 조언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요."

파리나 이탈리아 등 굴지의 패션 강국에서는 패션에 대한 조언이 가정 교육의 일환이다. 아빠들은 어린 아들에게 식사 예절, 여자를 대하는 매너, 면도하는 법에 덧붙여 패션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훈육한다.

아들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된 아빠의 패션 감각은, 후일 어떤 판매원의 감언이설과 여자 친구의 설득에도 굽히는 일이 없다. 양복의 역사가 3세대를 넘지 못한 한국에서 중년의 불쌍한 패션 감각은 숙명과도 같다는 소리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취약점은 사이즈다. 케네디 대통령의 집권 시절인 1960년대에 유행하던 아메리칸 스타일 수트가 여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한국뿐이다.

라인이 없이 펑퍼짐하며 캐주얼한 이 수트는 현재 아메리카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입지 않지만, 개성보다는 합의가 중시되는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유니폼으로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색깔인데, 화사한 색채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알레르기에 가깝다.

재작년에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맸던 밝은 하늘색 넥타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어두운 색은 진중함과 무게, 남자다움을 의미하는 반면 밝은 색은 가볍고 산만하며 날라리 같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이 문제점들을 유지하고 극대화시키는 근본은 대세를 따르는 것이 아름다움보다 중요하다고 굳게 믿는 신념이다. 몇 년 전 기업 CEO들 사이에서 페라가모 넥타이가 교복처럼 유행한 적이 있다. 페라가모에서 만든 넥타이는 물론 아름다웠지만, 이는 패션 감각의 상향 평준화가 아닌 동조의 법칙이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 결과다.

"튄다고 해서 무조건 멋지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신사의 아름다움은 그보다 제대로 갖추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 피부 체형, 이미지를 고려하고 거기에 맞는 색, 실루엣, 무늬를 찾아서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발목을 드러내느니 성을 갈겠다?

이 시점에서 한국형 젠틀맨의 매뉴얼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남성 클래식이 엄격한 법칙의 세계라 해도 그것은 유럽 역사를 통해 빚어진 것이므로 그 잣대로 한국 남자들의 패션을 재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터부, 장유유서, 합의의 미덕을 반영한 현실적인 신사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의외로 남성 패션에 있어서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노출이다. 원래 수트 재킷의 소매 아래로 드레스 셔츠의 소매가 1.5cm 정도 나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는 적어도 한국 중 장년층에게 있어서는 현실적으로 요원한 일이다.

여기저기서 얻어 들은 정보로 소매를 줄인 남자들의 절반 이상이 셔츠 노출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소매 길이를 늘렸으며, 처음부터 소매를 짧게 출시한 한 정장 브랜드의 경우 쇄도하는 수선 문의에 시달려야 했다.

바지 길이 역시 마찬가지로, 유럽식은 복숭아 뼈 근처에서 끝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점잖은 한국 남자들이 양말과 발목 노출을 받아들일 리 없다. 구두 굽 바로 위 또는 굽을 살짝 덮는 정도의 바지 길이로도 '신경 쓴 남자'라는 도장을 찍어 줘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한때 셔츠 속으로 비치는 하얀색 메리야스가 촌스러움의 상징이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서구 남자들이 입는 드레스 셔츠는 실크 또는 면 100%로 피부 위에도 그냥 입어도 무방한 반면, 국내 셔츠의 대부분은 면과 폴리에스테르 혼방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천연 소재의 런닝 셔츠를 입어주는 편이 건강상으로도 더 좋은 선택이다.

무엇보다 유럽식으로 입는답시고 살 위에 셔츠 하나만 입고 젖꼭지가 비칠까 봐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느니, 그냥 주변 사람들이 메리야스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패션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한 번에 알릴 수 있는 것, 저는 이것을 행복한 이미지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불편한 이미지는 나는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주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죠. 한국의 중년 남성들은 의외로 정도 많고 여리고 아주 로맨틱합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선택한 옷 하나로 마초라든가, 가부장적이라는 평을 받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요?"

젠틀맨이 지켜야 할 최소의 수칙

강진주 소장이 한국의 중년 남성들에게 신사로서 지켜야 할 몇 가지 단장을 제안했다. 개성을 표출하면서도 합의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최소한의 수칙이다.

여분의 넥타이를 준비하라

TPO를 무시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 파티나 사적인 모임 같은 즐거운 장소에서도 여전히 비즈니스맨처럼 딱딱한 복장을 하고 있는 중년 남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수트를 따로 준비하는 것은 어려울 테니 타이라도 여유분을 하나 준비하라.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직선 무늬를, 파티에서는 곡선 무늬를, 이 원칙만 기억해도 분위기를 맞추는 남자가 될 수 있다.

짧은 머리를 두려워하지 말라

탈모는 거의 모든 한국 남자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민이다. 서구에서는 아예 밀어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 제도권에서는 대단히 터부시되는 일이다. 이럴 때는 머리를 짧게 깎는 것만으로 훨씬 젊어 보일 수 있다. 여기에 뿔테 안경을 쓰면 너무 넓어진 피부 면적에 적당한 기준선을 그어줄 수 있다.

색에 대해 관대해져라

나이가 들면 전체적으로 이미지가 희미해진다. 여자들은 보석으로 이를 메우는데 남자의 경우에는 넥타이가 그 역할을 한다. 연두색, 복숭아색, 노란색이 들어간 넥타이나 행커치프를 시도하라. 이미 굳어진 안면 근육으로 억지로 웃는 것보다 화사한 넥타이 하나가 훨씬 부드러운 이미지를 줄 것이다.

한 달에 두 번 팩을 하라

중년 남성들의 가장 큰 피부 고민은 주름이 아닌 탁한 안색이다. 골프장에서의 그을림, 음주로 인한 탈수는 피부의 윤기를 빼앗아 간다. 예전에 불룩한 아랫배가 부티의 상징이었다면 요즘엔 윤기 있는 피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이 귀찮으면 한 달에 두 번이라도 마스크 팩을 하라. 얼굴에 붙이고 10분 후 떼어내는 팩만으로도 눈에 띄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