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예방 지침서 둘러싼 남녀 6인의 생각은…

인권위의 성희롱 지침서에 대해 대한민국의 20~30대 남녀가 대답했다.
이 중에는 조직문화에 완벽하게 동화된 톱니바퀴 형 인간도 있고, 대마초 금지에 동의하지 않는 준 아나키스트도 있으며, 남자 상사보다 높은 실적을 올리며 미모와 웃음은 여자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포스트 페미니스트도 있다.

남, 38세, 사진업, 기혼

행위자가 성희롱을 하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성희롱으로 인정된다니? 동기나 친구 사이에 장난처럼 일어난 일이라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나? 그럴 수 없다면 당하는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라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아도 성희롱 성립'이라는 조항에는 동의할 수 없다.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말로써 거부하고, 그게 힘들다면 표정으로라도 드러내야 하지 않겠나.

남자들은 보통 눈치가 없는 편이다.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음담패설을 즐기는 여자도 꽤 된다. 내 생각에 한국 여성들 중 노골적인 섹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자의 비율은 열 명에 한두 명 정도인 것 같다.

야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친밀감과 성적 경험과 성적 취향의 동등함이다. 서로 친하고 낯뜨거운 이야기도 기꺼이 즐기며, 또 섹스의 경험치가 비슷하다면 뜻이 맞아 서로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과 힘을 이용해 강제로 자신의 성욕을 충족시키려는 남자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음담패설을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성희롱이라는 건 유감이다. 면전에 대고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제한받아야 할까? 솔직히 많은 남자들은 섹시한 여자만 봐도 신음 소리가 어떨까 상상한다. 남녀가 모인 자리에서는 '상상만 하지, 그걸 꼭 말로 해야 되나'라고 하겠지만, 속으로는 '뭘 그런 것까지 성희롱이라고 하나'라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남, 33세, 출판업, 미혼

들은 사람이 성희롱이라고 느꼈다면 당연히 그건 성희롱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한국의 사회적 풍토 속에서 여성비하적 발언은 은연 중에 나올 수 있다. 자신은 그런 풍토에서 완벽히 자유롭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성희롱이 발생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남자와 여자의 소통불능이라고 본다. 남자들은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고 경험도 부족하다. 여자와의 소통법은 모르지만 어떻게든 여자와 접촉하고 싶은 남자들은 종종 철 없고 서툰 방식을 사용한다. 나는 학창 시절에 여성에 대한 관심은 차고 넘치는데 방법을 몰라 변태적인 방식으로라도 여성과 접촉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성희롱도 그런 심리가 아닐까? 게다가 남자들 중에는 여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낄 때 자신이 이긴 것 같은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모욕을 주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심리도 성희롱에 한 몫 한다고 본다.

지나치게 엄격한 성희롱 지침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즘엔 여자들이 더하다'라는 말도 있고, 실제로 피해 여성이 지나치게 민감한 경우도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들이 한참 더하고 있다. 극소수의 예를 들어 다수를 방치하기엔 우리 사회는 아직 너무 폭력적이다.

남, 28세, 유통업, 미혼

성희롱의 기준을 오직 피해자에게만 맞추는 건 좀 일방적이다. 평소 싫어하던 직장 상사라면 "오늘 괜찮네"라는 말 한마디로도 걸고 넘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상사는 누가 보호할 것인가.

물론 여자들이 느끼는 수치심이 90% 정도 맞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 딱 달라붙는 바지를 입었냐"라는 말에도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건 시정되어야 한다. 남자들의 눈이 여자 엉덩이에 쏠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혐오감을 느낀다면 교육을 통해서라도 인식을 시켜야 한다.

하지만 단순한 비호감이 성적 피해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고려했으면 좋겠다. 이런 엄격한 조항들이 피해자 입장에서도 마냥 유리한 건 아니다. 군에서는 여자 장교와 이야기할 때 문을 열고 하는 것이 규정이다. 남자 장교들은 혹시라도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악수하는 것도 삼가고 거리를 두는데, 여자 장교들은 이것 때문에 오히려 집단에서 소외받는 부작용을 경험하기도 한다.

사실 술자리에서까지 하나하나 보호받을 수 없는 것이 사회생활이다. 회식 자리에서의 성적 언동이 불편하면 거기 왜 앉아 있나. 신체 접촉까지는 아니더라도 야한 농담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싫으면 그 조직을 벗어나면 되는 거고, 견딜 수 있으면 계속 있으면 된다. 끝까지 남는 사람이 이기는 거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다.

여, 34세, 언론계, 미혼

성희롱 지침서를 보며 내가 그동안 성희롱에 대해 좀 관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밤에 문자를 받는 일 같은 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성희롱에 포함된다니 약간 의외다. 이 중 가장 찬성하고 싶은 부분은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아도 성희롱이 성립된다는 내용이다.

내가 속한 조직은 위 사람에게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상명하복 형의 조직이고 야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경우도 꽤 된다. 연예인들의 섹스 스캔들이 터질 경우가 그런데, 가볍게 농담처럼 주고받기도 한다.

한 번은 상사가 나와 또래의 남자 직원, 단 둘만 불러 놓고 대중이 선호하는 소재는 돈, 여자, 섹스, 세 가지라며 나를 향해 "섹스해 봤지? 해봤으니까 알 거 아냐"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큰 거부감을 표현하지 않고 "안 해봤는데요"라고 넘겼지만 생각할수록 기분이 상하면서 그게 성희롱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밖에도 "연예인 누가 그렇게 물건이 작다며?" "아들 낳는 체위가 따로 있다던데"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알게 된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그저 알고 지나갈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희롱 사건이 발생해도 여자가 죄인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해자는 교육을 받는 데 그치지만, 당하는 입장은 '회사 망신을 시켰다'느니, '별 것도 아닌 걸로 유난 떤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불쌍한 애'가 아닌 '시끄러운 애'로 찍히는 것이다.

그리고 가해자도 복수심 반, 어색함 반으로 피해자를 각종 업무에서 소외시켜 결국 회사를 그만 두는 경우도 봤다. 인권위도 좋고 지침서도 좋지만 이렇게 쉬쉬하는 문화가 해결되지 않으면 피해는 더 커질 수 있다.

여, 29세, IT업, 미혼

개인적으로는 룸살롱 데려간다는 이유로 성희롱이라고 한다면 직장을 때려 치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안에서 벌어지는 행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수치심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음담패설에 바르르 떠는 타입은 아니다. 특히 다같이 웃어 넘길 수 있는 분위기에서 혼자 예민하게 구는 건 옳지 않다고 보는 편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많은 사람 앞에서 나룰 성적 화두로 올리는 경우,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나를 우습게 보도록 만드는 사례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감안할 수 있다고 본다.

나의 성희롱 판별 여부는 호감도에 따라 상당히 달라진다. 특히 괜찮게 생각하던 남자가 나에 대해 성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이 차가 20살도 넘게 나는 상사가 성적 언동을 한다면 소름이 끼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나 정도면 괜찮다',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게다가 자신이 상사이므로 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는 것 같은데 완벽한 착각이라고 본다.

지금처럼 밥 먹듯이 직장을 옮기는 시대에 이런 걸 참고 넘기는 여자가 몇이나 되겠나. 게다가 요즘 애들은 학교에서부터 체벌 교사를 신고하는 것을 배운다. 직장의 상사들은 부디 이런 세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여, 27세, 건설업, 미혼

지침서에 나오는 내용들은 대부분 내가 속한 조직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성희롱 예방 교육은 자주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현재 사무실의 남녀 비율은 8대 2로, 남자는 모두 정직원, 여자는 모두 계약직이며, 과장급 이상에 여자는 한 명도 없다.

근무 중 회장이 등 뒤로 와서 뒷덜미 속으로 손을 쑥 집어 넣고 "따뜻하다. 매일 넣어야겠다"고 말하는 일도 일어난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여직원들은 회장의 각별한 관심을 '간택'으로 생각한다.

회장의 주말 산행에 동행하는 산행단이 있는데 차출 기준은 알 수 없지만 나도 한 번 불려 나갔다가 부장과 상담까지 해가며 빠져 나온 적이 있다. 여기에 동행하는 여직원들은 회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또 급이 갈린다. 회장이 각별히 예뻐하는 듯한 여직원은 부장이 따로 불러 회사 생활이 힘들지 않도록 신경 써주는 것 같다.

산행을 거부했던 한 여직원은 근무태만으로 해고됐고, 술자리에서 치근덕대는 남자 직원을 노동조합에 고발한 여직원은 당일 오후에 바로 잘렸다. 임원급이 아닌 사원이나 대리급의 남자 직원들도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회식 자리에서 여자들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남자 상사들은 여직원들이 자신을 어려워하고 예쁨 받기를 바라는 그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 룸살롱이 아니고서야 장년 남성이 젊은 여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많지 않으니까. 단순한 성욕보다는 소외되고 억눌린 자아가 비틀려 발현된 것이라고 본다.

본질적으로 위 사람들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 그들의 의식이 곧 기업의 문화가 되기 때문이다. 약자를 하대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려는 생각이 사라지고 여성 관리자가 늘지 않는 한, 이런 문화가 사라질 날은 먼 것 같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