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노부부 조명 거쳐, 명퇴, 다문화 가정 등 다뤄

연극 '엄마를 부탁해'
우연히 가족연극 공연 이벤트에 당첨돼 오랜만에 온가족을 이끌고 극장으로 향한 A씨. 한바탕 웃고 즐기는 유쾌한 가족극을 기대했지만, 잠시 후 펼쳐진 연극은 그게 아니었다. 시종일관 가족의 피폐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들추다 결국 눈물까지 쏙 빼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가족연극'은 두 가지 양상을 가리킨다. 하나는 어린이연극 혹은 아동극처럼 사실상 아이들과 그 보호자들을 위한 연극이다. 다른 하나는 가족을 소재로 한 연극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시기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후자다. '엄마 신드롬'에서 촉발된 가족연극의 호황은 이후 부자(父子), 노부부 등 각 가족 구성원의 조명과 명퇴, 다문화가정 등 사회적 이슈로 이어지며 보다 다양하고 현실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가 던진 최루탄의 위력

가족연극의 중심적인 키워드는 아직도 '엄마'다. '엄마 열풍'의 원조격인 <친정엄마>를 비롯해 <친정엄마와 2박 3일>, <엄마를 부탁해>, <애자> 등이 현재 순회공연을 통해 전국의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연극 '친정 엄마'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인 엄마와 딸의 관계를 조명하며 전통적인 어머니 상의 애달픈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주제와 소재 모두에 최루성 장치가 설치돼 있다. 엄마이자 딸인 여성 관객과 가부장제 안에서 '가해자'인 남성 관객은 심리적 연민과 죄책감의 눈물에서 자유롭지 않다.

<친정엄마와 2박 3일>은 아예 티켓을 줄 때부터 휴대용 화장지를 함께 나눠준다. 대놓고 울 준비를 하라는 선전포고인 셈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무조건 울리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감정의 완급조절을 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 작품에 출연 중인 배우 김여진은 시종일관 감정을 절제하다 특정 부분에서만 울어야 하는 고충을 토로하기도 한다. 덕분에 관객은 보다 먹먹한 가슴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3년 만에 다시 공연되는 <친정엄마>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희생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안쓰러워하는 딸의 관계에 집중한다. 김광보 연출가는 "원작에 충실하되 관객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현실감 있는 모녀 관계를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 이어 연극으로 만들어진 <애자>는 무대에서도 티격태격하는 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다. '엄마'를 중심으로 한 가족연극은 이처럼 한 장르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에서 출발해 무대로 온 <엄마를 부탁해>는 올 상반기 구태환 연출에 작곡가 김형석, 음악감독 박칼린이 합류한 뮤지컬로 재탄생할 것으로 알려져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연극 '동치미'
해체되는 '가족'의 신화

가족연극의 호황은 전형적인 가족의 신화를 해체하기도 했다. 이전까지 리얼리즘 연극 안에서 가족은 때로 그 피폐한 진실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대개 그 결말은 '그래도 가족은 사랑의 보금자리로서 지켜야 할 것'이라는 천편일률적 결론으로 치닫기 일쑤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전통적인 가족의 신화를 부정하고 현실의 가족이 처한 상황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연극들이 등장하고 있다. 은퇴, 실업 등 힘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 노부부의 말년, 가난과 장애로 점철된 다문화가정의 아이 등 가족의 긍정적인 이미지 구축을 지향하기보다는 현실의 가족을 통해 사회를 반영하는 가족연극이 출현하고 있다.

<동치미>는 최루성 연극이라는 점에서 '엄마 연극'과 비슷하지만 눈물을 촉발하는 지점이 다르다. '엄마'는 결국 혼자 떠나고 남은 자들은 엄마를 기리지만, <동치미>의 노부부는 함께 먼 길을 떠난다. 이 작품에서 온전한 가족이란 이들 부부뿐이다.

출가한 자식들은 부모에게서 심정적, 물리적으로 멀어진 채 속만 썩이는 존재들이다. 의지할 존재가 사라진 세상에서 홀로 남은 이가 선택할 길은 많지 않다. 지난해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 부부를 연상시키는 결말은 아련하고 묵직하게 관객의 눈시울을 자극한다.

연극 '조용한 식탁'
반면 코미디인 <명퇴와 노가리>는 명예퇴직한 아버지와 실업자 아들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담아낸다. 30년 넘게 가족을 위해 일해왔지만 집에서 놀고 있는 아버지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강도와 어설픈 해프닝을 벌여 체면을 세우는 것. 가부장제는 남성 자신에게도 억압이 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성을 상실한 부자(父子) 만의 가족은 종종 위태로운 상황을 맞기도 한다. 2인용 식탁이 무대 구성의 전부인 <조용한 식탁>은 멀리 떨어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한 명의 여성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새 처를 들임으로써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려 하지만, 대화가 아닌 독백만을 반복하는 세 사람의 만남은 이들이 결코 가족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할 뿐이다.

한편 정상적인 가족의 범위에 도전하는 연극도 있다. 의 가족은 난쟁이 아버지와 베트남에서 온 어머니, 말 더듬는 가짜 삼촌으로 구성된 완득이네다. 외국인 거주민이 100만 명을 넘어선 다문화 시대에 도래하기 시작한 사회적 갈등과 장애인에 대한 여전한 편견을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가족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

'가족연극'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소재를 채택한 연극도 있다. 캐나다 극작가 미셸 마크 부샤르가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 무대에 올리는 <유리알 눈>은 '친족 성폭력'이라는 금기에 도전한다.

연극 'Hey, 완득이'
친족 간 성폭력 문제는 신문의 사회면에 오르내릴 정도로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특히 아동 성폭력의 문제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나영이 사건' 같은 문제를 환기시키면서 이 문제를 연극에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부샤르의 작품 중 <고아 뮤즈들>에 이어 두 번째로 가족문제를 다루고 있는 <유리알 눈>은 소통 부재의 인형 장인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어린 시절에 받은 성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상처로 고통받는 한 인간의 모습은 여기서 인형을 매개로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번 연극은 지난 20년간 호흡을 맞춰온 연출가 까띠 라뺑 외대 불어과 교수와 희곡 번역가 임혜경 숙대 불문과 교수가 극단 프랑코 포니를 정식으로 세운 후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연출을 맡은 까티 라뺑 교수는 "작가는 현대인이 은폐하려고 했던 불편한 영역을 예민하고 극적인 장면으로 만들어냈다"고 설명하며 "등장인물의 급변하는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을 통해 관객의 공감을 얻어낼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가족 역시 변해왔다. 최근 가족연극의 변화 역시 이런 사회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가족의 다양한 면면을 담아내고 있다는 방증이다. 김효 연극평론가는 이와 관련해 "'가족'은 이 시대의 혼란과 상처를 압축하고 있는 화두 중 하나"라고 진단한다.

연극 '유리알 눈'
그는 "연극에서 리얼리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우리가 상식 속에 파묻혀 모르고 지내던 우리 안의 감춰진 모습을 벗겨내고 드러낼 때"라고 설명하며 편향된 가족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현실의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그릴 때 수준 높은 작품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