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최고은 작가 사건 후 예술가 처우 개선 움직임 이어져

거장 감독들의 연이은 국제영화제 수상으로 세계 무대서 입지를 확보하게 된 영화계. 세계 뮤지컬 관계자들이 주목하는 아시아의 시험대. 열악한 환경에서도 우뚝 선 발레 강국. 오늘날 세계 속에서 입지를 굳힌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게 한국 예술의 전부는 아니다. 일부 예술가들이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밥을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와 싸우고 있다. 최근 유망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은 이 문제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그가 남긴 쪽지이다. 먹다 남은 음식물쓰레기가 판을 치는 21세기의 한국에서, 남는 밥 좀 달라는 쪽지는 너무 낯설어서 현실감마저 들지 않을 정도다. 그동안 기사화되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비참한 종말을 맞은 예술가들은 적지 않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런 상황이 자기 분야에서 아직 자리잡지 못한 신진 예술가들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 <젊은 날의 초상>, <겨울 나그네>로 잘 알려진 곽지균 감독도 지난해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이 없어 너무 괴롭다'는 유서를 남기고 떠난 곽 감독의 참극은 화려한 영화계의 이면을 드러내주며 파장을 일으켰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 '2011 예술 정책 대국민 업무보고회'에서 정병국 문화부 장관, 연극배우 박정자씨,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씨가 나란히 앉아 있다.
뮤지컬 <코러스라인>에 출연한 한 중견배우는 제작사 간부에게 밀린 출연료를 받으러 갔다가 돈 대신 망치세례를 받아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가 받기로 한 출연료는 200여 만 원. 최근 잇따른 무대 진출로 억대의 출연료를 받고 있는 아이돌 스타들과 비교할 때 전문 뮤지컬배우들은 아직도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예술가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2월 17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생태계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마련한 토론회에서는 문학·연극·무용·클래식·미술 등 각 분야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연극배우 박정자 씨는 자신조차 은행에서 직장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신용카드 발급을 거절당한 사례를 털어놓으며 "땅에 떨어진 예술인의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특히 그는 4대 보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예술인들의 현재와 곧 '예비실업자'가 될 예술 전공자들의 처지를 설명하며 "직업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국회에 계류 중인 '예술인 복지법'의 제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예술계의 이런 '난리'를 보는 대중의 시선은 반반이다. '예술가가 굶어죽었다'라는 사실에 동정을 표하는 이들이 많지만, 결국은 그것조차 예술가의 숙명이라는 시선도 있다. 이른바 형평성의 문제다. 예술인 복지법은 예술가들을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우해달라는 요청이지만 88만 원 세대가 고통을 겪는 지금, 사회는 이런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일 만큼의 심적, 물적 여유가 부족한 상황이다.

故 곽지균 감독(좌), 故 최고은 작가(우)
이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예술가냐, 아니냐의 구분 대신 사회 전체의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예술가라서 밥 먹기 어려운 것이 아닌, 개인의 역량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나는 평균적 복지 수준이 보장되는 사회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현재로서는 꿈 같은 이야기다. 무상급식 건도 진통을 겪는 마당에 예술가의 안정된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는 요원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각자 그런 사회를 꿈꾸며 그 염원을 자신의 예술에 담기도 하고, 혹자는 예술계를 떠나기도 하며, 때로는 어느 쪽을 선택하기도 전에 안타깝게 스러지기도 한다. 세계 15위 경제대국이자 문화강국인 대한민국의 또 다른 이면이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