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식 대량 축산이 가져온 구제역 파동… 육식 지고 채식 뜨고

흙으로 지저분해진 붉은 덩어리가 포크레인에 밀려 구덩이로 떨어진다. '꿱' 하는 단말마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덩어리는 몸을 뒤집어 일어나더니 한번 푸르르 떤다.

살아 있는 돼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은 미친 듯이 울부짖는 짐승의 소리로 생지옥이 된다. 가로 30m, 세로 10m의 구덩이는 1000마리가 넘는 돼지들로 가득 찼다. 밟히고 눌리며 층층이 쌓인 돼지들의 울음에 매장하는 사람이 먼저 미칠 지경이다. 자, 그럼 이제 당신은 돼지 고기를 끊을 준비가 되었는가?

채식주의자들만 돌을 던져라

지난 겨울 발생한 구제역으로 인해 올해 2월까지 약 880만 마리의 동물이 땅에 묻혔다. 살처분당하는 돼지 동영상은 힘 없이 강간당하는 아프리카 소녀처럼 사회 전체를 죄책감에 빠뜨렸다. 처참한 상황 앞에서는 늘 스트레스를 못 이긴 인간들의 싸움판이 벌어지듯이 돼지 동영상 아래에도 결론 없는 논쟁이 펼쳐졌다.

'저런, 나쁜 놈들', '뭐가 나쁘다는 건가요? 삼겹살 한 번도 드신 적 없나요?', '더 편안하게 죽일 수도 있는데 저건 아니죠.' '어차피 칼로 찔려 죽든 눌려 죽든 똑같죠. 댁이 돼지 심정을 아세요?', '그러는 넌 돼지 심정이 돼봤냐?', '채식주의자 아니면 다 조용히 해라'

돼지와 채식주의자 빼고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돼지가 되는 것도,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4대강 사업할 돈으로 돼지를 안락사시켜라'는, 즉 '욕 먹던 사람들이 계속 욕 먹어라'는 회피성 댓글, '다음은 인간 차례'라는 저주성 댓글, '사람 생명만이 생명인가'라는 고뇌성 댓글은 가득하지만, '이제부터 절대 고기를 안 먹겠다'는 똑 부러진 선언은 100명 중에 한 명도 되지 않는다.

고기를 끊는다는 건, 채식주의자가 1%도 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스스로 까탈스런 괴짜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미식의 문제에서 사회화 정도를 결정짓는 문제로 확대된다.

신념과 적응의 비율을 어느 정도로 조절할 것인가. 어리고 무능한 여직원의 눈물 하나하나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의 도덕성을 한정지은 사람이라면 돼지의 눈물에도 반응할 이유가 없다고 결심할 수 있다. 어차피 완벽하게 선하기는 힘들다고 믿는 이들에게 채식과 육식의 당위는 소모적이고 비현실적인 주제다.

그러므로 육식주의와 채식주의 논란의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원칙주의자들이다. 자신의 한계보다 진실이 중요한 이들이다. 사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도 돼지는 끊임 없이 묻히고 있고 우리는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오늘 아침 돼지 동영상을 보며 흘린 눈물과 그날 저녁 김치찌개 속을 떠다니는 돼지 고기와의 괴리 사이에서, 스스로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한다. '고기를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

주류 문화로 떠오른 채식주의

사실 채식주의는 더 이상 옹호할 것이 없다. 인터넷에만 접속해도 돼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금의 상황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다 씹은 고기 조각도 도로 뱉어내게 만든다. 기세를 타고 때마침 쏟아지는 책들은 채식주의의 정당성과 건강함, 육식주의자들의 무심함과 무지에 대해 성토한다.

"인간은 동물을 아끼고 그들이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물을 먹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도덕적 불편함을 가져오고 그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에는 3가지가 있다. 가치관을 바꾸든지, 행동을 바꾸든지, 인식을 바꾸든지."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를 쓴 멜라니 조이는 육식에 대한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죄책감 때문에 인간이 공감 능력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고기를 먹을 때 정서적, 심리적으로 공격당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의 고통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마비시켰다는 것이다.

'괴로움을 덜 느낄 거야' '인간과는 타고난 역할이 달라' '고기를 끊으면 축산업 붕괴는 누가 책임지지?'

따라서 사람들은 가능하면 생명체의 형태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마트에서 고기를 사기 원하며 잔인하게 도축되는 장면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에 맞춰 도축업자들도 자신들의 정체를 감춰 왔다. 도시에 사는 사람 중 평생 돼지나 소가 도살되는 장면을 한 번이라도 직접 목격한 경우가 몇이나 되는가. 그러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은밀한 곳에서는 실로 끔찍한 장면이 펼쳐진다.

똥오줌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비좁은 우리 안에서 사육되는 돼지들은 도살을 위해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다. 앞 동료의 비명 소리를 듣고 멈칫거리기라도 하면 '속도와 효율'이 지상과제인 인부들에 의해 전기 봉으로 두들겨 맞고 지져진다.

비명 속에서 '꼭지'가 돈 인부들 중에는 돼지의 코를 나이프로 자르고 소금물로 짓이긴 행위를 고백하는 이들도 있다. 돼지에게 사격 게임을 가르쳤더니 조이스틱으로 80%의 명중률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영리한 존재인데도 말이다.

고기뿐 아니라 유제품 섭취까지 금지하는 비건(vegan)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채식주의자들은 달걀이나 우유는 허용하는데 사실 가장 끔찍한 일은 이곳에서 벌어진다. 젖소는 젖을 내기 위해 일생의 대부분을 임신 상태로 보내며, 과도한 젖 짜기로 인해 뼈가 변형되고 제대로 서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면 미련 없이 도륙장으로 보내진다.

달걀을 얻는 목적으로 사육되는 닭들은 평생 고개만 겨우 돌릴 수 있는 우리에 갇혀 죽도록 알만 낳는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다른 닭들을 쪼아 먹거나 피가 날 때까지 철창에 가슴을 비벼댄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간은 이제 고기를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생존이 아닌 미식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이 합당한가? 이제 육식주의는 수세에 몰렸다.

육식주의자의 항변

육식주의를 함부로 옹호할 수 없는 건 아직 끝나지 않은 동물들의 비명 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기를 고집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도덕과 당위뿐 아니라 스테이크의 육즙에 대한 굳은 애착 위에서 주장을 펼치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기를 먹는 사람들 중 자신의 부도덕함을 인정하는 이들과 동물보다 내가 더 불쌍하다고 호소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철학을 가진 육식주의자를 찾아내는 건 요즘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미국의 환경운동가 마이클 폴란이 여기에 대해 진지하고 정직한 의견을 내놓았다.

"개체의 권리에 기초한 인간의 도덕은 자연 세계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생태계 전체가 아닌 한 동물의 권익에 집중하는 것이 자연 법칙을 위배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의견의 배경은 산타크루즈 섬의 야생 돼지 사건이다. 그가 책을 집필하는 동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는 명사수들을 고용해 섬에 있는 야생 돼지 수천 마리를 쏘아 죽이고 있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여우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 인간에 의해 섬으로 들어온 돼지들은 농장을 탈출해 야생화되어 토양을 헤집고 도토리의 씨를 말리는 등 섬의 생태계를 크게 훼손시켰다. 이들의 수가 늘자 작은 육상 포유류를 잡아 먹는 검독수리의 개체수도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돼지 새끼를 사냥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독수리들이 그보다 잡기 쉬운 여우 새끼에게 눈길을 돌린 것이다.

당시 동물보호협회는 소형 비행기를 띄워 '돼지를 구하자'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대중에게 호소했다. 논점은 종으로서의 돼지가 아닌 '부모를 잃고 개에게 쫓기다가 칼로 죽임을 당하는' 한 마리의 돼지로 옮겨갔다.

"도덕은 인간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해 고안한 인간 문화의 산물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도덕이 유용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연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훌륭한 지침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도덕 체계가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적절한 지침이 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정말 인간중심적인 발상이 아닐까?"

자연을 비추는 다큐멘터리는 인간에게 엄청난 경외심과 함께 혼란을 불러온다. 남극에 사는 펭귄들은 겨울이 찾아오면 4개월간 햇볕과 음식, 물, 모든 것이 차단된 극단적인 상황에서 서로의 등을 마주보고 둥글게 서서 그 시간을 버틴다. 마음 약한 이들은 그 불쌍한 것들을 당장 좋은 환경으로 피신시키고 싶어하겠지만, 그들은 거기에 '배치' 받았기에 그 고통을 견뎌낸다. 고통이라는 표현 역시 인간의 관점이고 자연 속에서 그것은 일종의 겸양일 수도 있다.

자연의 법칙은 이렇게 상당히 자주 인간의 도덕적 상식을 벗어난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연보다 더 관대한가? 동물에게 보다 더 지혜로운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폴란은 포식 행위를 "자연의 계획 안에 있는 고유한 악"이라고 지칭한 매튜 스컬리의 견해에 대해 어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그들은 우리의 동물성뿐 아니라 동물의 동물성까지 불쾌하게 여긴다. 이제는 그들이 사실상 자연 그 자체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된다."

물론 자연 속의 동물이 아닌 가축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하지만 가축 문화는 인간의 납치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동물과 인간의 공생 관계에서부터 출발했다.

기회주의적인 종들이 인간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면 생존과 번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인간에게 살코기와 우유를 제공하는 대신 먹이와 안전한 터를 부여받았다. 대부분의 동물은 야생의 상태에서 더 빨리 더 잔인하게 다른 포식자들에 의해 먹힌다. 개체가 아닌 종으로 동물을 바라 본다면 "그들은 죽지만 죽지 않는다."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사이코 패스라고 한다. 상대방의 범주를 인간에서 동물로 확대한다면, 인간의 방식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채식주의자와 동물의 행복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다고 믿는 육식주의자, 어느 쪽이 더 '제 정신'일까?

다행스럽게도 양쪽 다 한 가지 공통된 결론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육식을 줄이자는 것이다. 육식주의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동물들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고기와 달걀에 걸맞은 안위를 보장 받아야 하는데 공업식 대량 축산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근거한 대량 축산은 광우병, 조류독감 등 현대인을 위협하는 가축 질병의 발생지다. 동물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든, 동물의 고기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든 관계 없이, 건강하게 키운 동물의 고기를 조금만 먹는 것은 이제 모든 이들이 마주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참고서적: <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다른 세상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멜라니 조이, 모멘토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