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지는 부부관계, 그들만의 연애방식 등 사실적으로 부각

영화 <할머니와 란제리>
"나도 늙고 싶지 않았다구요. 혼자 외롭게 늙어가긴 싫어요"

고운 백발의 70대 여성 헬레나는 미래를 본다는 여자 앞에서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낸다. 40년간 살 부대끼며 살아온 남편이 그녀의 솔직함에 진절머리가 났다며 이혼을 요구한 데 이어, 딸뻘되는 삼류 여배우와 재혼을 하겠다고 나선 것. 그녀는 남편에게 완전히 버려져 혼자 남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어깨를 들썩인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외롭기까지 한 현실은 가혹하지 않은가.

우디 앨런 감독의 <환상의 그대>는 헬레나를 중심으로 그녀의 가족 구성원들의 얽혀있는 관계를 담담하면서도 사실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조깅과 건강식품에 매달리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생을 부여잡기 위해 남편은 이혼 후 치아미백과 태닝까지 하며 다시 한번 젊음을 애써 되돌리고자 한다.

재혼한 젊은 부인을 통해 아들을 낳겠다며 밤일에 몰두하는 그. 그러나 젊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케 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노신사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노년의 삶이 다루어지는 요즘의 영화나 연극에는 현실의 경제적 문제보다는 노년의 달라지는 부부 관계라던가, 그들만의 연애방식, 다른 세대와의 소통과 교감 등 정서적인 측면을 사실적으로 부각시킨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영화 <환상의 그대>
여성 관련 행사에서 곧잘 재상영되는 는 스위스에서 만들어졌지만 한국에서도 유효한 메시지를 시사한다. 남편이 먼저 떠난 후 집안에만 갇혀 있던 80세의 마르타 할머니는 친구들의 격려로 속옷 가게를 열려고 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시골 사람들과 가족들은 '다 늙어서' 주책없다며 어떻게든 가게 문을 닫게 하려고 몸부림친다. 마치 나이가 들면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마저도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것처럼, 나이든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냉소적인 시선은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중 하나인 <당신과 나>는 젊은 세대와의 관계에 주목한다. 한 할머니가 소유한 베이징 아파트로 이사온 샤오마는 처음엔 할머니의 관심을 간섭으로 받아들이며 불편해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점차 젊음과 늙음이 가진 장점을 수용하며 우정을 쌓아간다는 줄거리다.

2년 전, 나이와 관련한 '에이징 섹션'을 따로 두었던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는 올해도 나이와 관련한 작품이 적지 않다. 처음으로 흰 머리를 발견한 순간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작품도 있고, 한 중년 여성이 퍼즐을 통해 자아 성찰을 하게 되는 작품도 있다.

권은선 수석 프로그래머는 노년의 다양한 삶의 면모를 조명하는 영화의 등장에 대해 "여성영화제가 여성의 전 생애 주기를 다루다 보니 노년 여성의 삶도 자연스럽게 다루게 되는 것 같다. 또 기존의 노년에 대한 편견들, 가령 욕심이 없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하며 성적인 욕망이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반기를 드는 작품들이 나온다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는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순풍에 돛 단 듯, 전국 극장에서 순항 중이다. 네 명의 노인이 만들어가는 두 개의 사랑은 순수하고 지극해 곧잘 눈물샘을 자극한다.

입은 걸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남자와 미소가 따듯한 여자의 두 번째 사랑, 치매에 걸린 아내를 향한 남편의 한결 같은 사랑. 그들이 처한 상황이 결코 풍요롭거나 여유롭지 않기에, 돈으로 모든 가치가 재단되는 현실에서 그들의 끈끈한 애정은 더욱 빛을 발한다.

연극 <늙은 부부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노년의 삶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조명해온 위성신 연출가는 지난해 10월, 2인극 <해질역>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삶의 끝자락에 서서 어떤 미련이 남았는지,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삶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내(여옥주)가 죽을 때 부인의 곁을 지키겠다는 남편(차만식)의 오래된 약속과 그 순간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 아내는 두려움 속에서도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삶의 끝자락에 선 부부의 이야기는 노년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이를 막론하고 언제든 불쑥 다가올 수도 있는 죽음에의 태도는 오히려 나이든 사람이기에 한층 여유롭고 평화롭다. 위성신 연출은 '노인=죽음'이라는 등식을 넘어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펼침으로써 인생의 마지막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이런 연출가의 시선은 '해질 역'이란 이름의 지하철 역에서 비춰지듯 죽음이라는 주제 앞에서도 익살을 부릴 수 있는 여유로 나타난다. 죽음을 처리하는 기법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뉘앙스가 아닌 판타지스럽게 연출해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런 태도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와 마찬가지로, 노인들을 활력 넘치고 건강한 사람들로 무리하게 그리기보다는 젊은이들은 가질 수 없는 연륜과 여유를 가진 사람으로 표현하며 긍정적인 노년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