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평균수명 늘지만 삶의 질 떨어져… OECD 노인자살률 1위생존서 자아실현으로 발상의 대전환과 개인ㆍ사회ㆍ정부 노력 필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우연히 공원에서 만난 남녀는 첫 눈에 서로에게 반해 곧바로 동거에 들어간다. 결혼식을 준비하고 올리는 시간도 아까워 냉수 한 그릇 놓고 가볍게 부부가 된 이들은 신혼답게 뜨거운 밤을 보내기 시작한다.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낯뜨거운 장면들의 연속. 그리고 '죽기엔 너무 젊다. (too young to die)'고 아쉬워하는, 제목까지 모든 게 뜨거웠던 이 영화는 기어이 제한상영 등급 판정을 받으며 논란을 일으켰다.

섹스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지던 시대, 과감하게 고정관념에 도전했던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의 이야기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노년의 이미지에는 대개 약해진 기력 때문에 죽음의 느낌이 짙게 배어있다. 생산 활동을 멈춘 노인들은 은퇴 후 여유롭고 우아하게 삶을 즐기기보다는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진 채 인생의 종착역을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들로 보인다.

마치 노년이란 부류가 따로 있는 듯, 다른 세대와 완전히 구분해버리는 이런 폭력적 분류법은 자신은 노인이 되지 않을 거라는 젊은 세대의 어리석은 착각에서 기인한다.

"젊은이는 자신이 영원히 살 거라고 믿는다"는 헤밍웨이의 말은 이런 젊은 세대의 착각에 직격탄을 날린다. 누구나 노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모든 인간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노년을 향해 걸어간다. 때문에 노인을 타자화시키는 젊은 세대의 선입견에서는 어느 정도 노화에 대한 공포와 그로 인한 저항의 몸부림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죽어도 좋아>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서양사에 나타난 노년의 역사를 담은 <노년의 역사>는 이 같은 노년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전복적으로 들여다본다. 현대인에게 읽히는 모든 인류 역사는 대개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젊은 시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노년의 역사>에서는 이런 전형에서 벗어나 시대의 암흑기를 돌파해온 노년의 위대함을 칭송한다. 물론 책은 노년을 치명적인 병으로까지 느꼈던 그리스인들이 노화의 신체적 요인들을 연구했음을 지적하는가 하면,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추함과 죄의 알레고리로서 노년을 이용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반면 중세의 노인들이 신체적 무력함만을 제외하면 사실상 어떤 장애도 없었음을 증명하면서 중세사회의 이중적인 태도를 발견하기도 한다.

노인에 대한 이 같은 모순적 시선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노년을 불평하는 사람은 모순적이며, 현자는 인생의 모든 시기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내용을 통해 키케로는 노화 그 자체보다 나이듦을 현명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결국 그 옛날에도 '노년'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중요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4월 7일부터 열리는 제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출품작 <100!>(카린 브랙 감독)은 이런 고래의 교훈을 다시 한번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전한다. 4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등장하는 0세부터 100세까지의 인물들은 빠른 속도로 한 단어씩 이야기하며, 한 여자의 삶을 한 편의 담담한 시로 완성시킨다.

제1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출품작 <100!>
이때 등장인물은 역순으로 등장해 100부터 0에 이르는 숫자를 차례대로 말한다. 101명의 사람들이 전해주는 나이듦에 대한 짧은 고찰은 결국 젊음과 늙음이 같은 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나이듦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초고속 고령화 사회에 산재된 문제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런 나이듦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단순히 학문적 이론을 벗어나 사회 전반이 직면해 있는 시급한 현안이 됐다. 2000년부터 노인인구 7%에 도달해 고령화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는 2006년부터 5년마다 종합적인 국가적 저출산 고령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해 수행 중이다.

OECD 선진국에서도 노인인구 7%에서 종합적인 국가적 대책을 수립해 시행한 경우가 없었기에 선진국보다 빠른 대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비가 빠른 만큼 고령화 사회에 관련된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OECD국가 중 노인자살률 1위를 보이고 있을 정도로 정책이나 제도가 현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노인학협회의 존 핸드릭스 회장이 "한국의 고령화 현상은 거의 혁명적"이라고 하며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이처럼 심각할 정도로 빠른 고령화 사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영화 <오슬로의 이상한 밤>
노인들이 최악의 선택을 하는 이유는 바로 삶의 질 문제와 직결된다. 노인에 대한 인식의 문제도 있지만, 이로 인한 노동생산성의 문제도 심각하다. 고령화는 생산 가능 연령층(15~64세)의 규모와 비중을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 참여 인구 중에서도 고령 인구의 비중을 증가시켜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제한된 파이를 가지고 세대 간 갈등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때 고령층에 대한 부담 의무가 있는 젊은 세대들이 들고 나오는 것이 바로 노년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환경이나 개인의 상태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일반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노년층에게 은퇴를 종용하는 것이다. 노인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이미지의 반복과 확산은 초로의 나이부터 벌써 무능과 정상적인 사고 능력의 지연을 초래하고 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사회 연구실의 이소정 연구원이 발표한 <고령자의 사회참여 활성화 방안>의 노인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의 근로활동 참가율은 94년 28.5%에서 30%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미취업 노인의 32.2%가 일할 의지가 있으며 이중 68.2%는 생계비 마련과 용돈 등의 경제적 이유로 취업을 희망하고 있다. 특히 취업 희망 노인 중 주5일 풀타임 근로를 희망하는 비율은 16.8%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취업 시장에서 젊은 생산연령층과 중복되는 지점이 적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고령화 현상에서 우선적인 해법은 무엇보다 발상의 대전환에 관한 것이다. 예전이야 은퇴와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정상적인 활동이 끝나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실버영화관
고령화 문제는 상대적으로 생산력이 부족한 인구집단의 비율이 커지는 문제인 만큼, 노년에 대한 개인의 인식 개선 노력과 함께 사회 통합을 위한 정책적 패러다임의 확장이 수반될 때 고령화 사회는 기본적 생존에서 다음 단계인 자아실현의 장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문화계에서 일어나는 변화

그렇다면 문화계는 고령화시대에 맞춰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그동안 별다른 문화생활이 없던 한국의 실버 세대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곳은 영화다. 최근 극장가는 노년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속속 선뵈고 있다.

그 중 가장 선봉에 서 있는 작품이 만화가 강풀 원작의 이다. 연극으로 먼저 선보여 호평을 받았던 작품은 영화화되어 전국에서 124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1, 2위를 다툴 정도다.

2~3년 전만 해도 희화화되고 주변부에 밀려나 있던 노년의 삶은 청춘물과 비교해 영화적 콘텐츠로도 결코 밀리지 않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진정한 노인의, 노인을 위한 영화라곤 없었던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보다 앞서 1월 말에는 우디 앨런 감독의 연애소동극 <환상의 그대>가, 2월 초에는 노르웨이의 이 개봉되며 노년층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특히 평생 기관사로 일해온 오드 호텐(바드 오베 분)이 은퇴하는 날 겪은 하룻밤을 마치 판타지 영화처럼 기묘하게 담아낸 <오슬로의 이상한 밤>은 노년층 영화의 장르 확장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게 한다. 평생을 선로를 이탈해본 적 없는 기관사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인생에 접어든 노년층의 당황스러움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중하게 전해진다.

노년의 삶을 공감하는 영화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과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실버영화제의 등장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은 종로구 낙원상가에 위치한 허리우드 극장이다. 2009년 1월에 개관해 지금까지 20만 명을 훌쩍 넘기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 달 관객이 1만 2000명에서 1만 5000명 사이로 매달 증가하고 있다. 만 55세 이상은 2000 원만 내고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데, 주 이용고객은 65세에서 80~90대에 이른다. 처음에 혼자 왔던 이들은 친구와 함께 다시 오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모임 장소로 이곳을 택하기도 한다.

일주일에 영화 한 편이 상영되는데, <벤허>나 <미워도 다시 한번>, <삼손과 데릴라>처럼 추억의 고전영화들이 주를 이루지만 최근에 개봉한 <그대를 사랑합니다>나 <친정엄마>, <라스트 갓 파더>와 같이 요즘 영화 중 그들에게 괴리감이 없는 영화를 선별해 상영하기도 한다.

의 김은주 대표는 "어르신들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이런 공간은 앞으로도 늘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에 대해서는 재정적으로 지자체의 도움 역시 절실하다. 또 그분들에 대한 우울한 조명보다는 노년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를 통해 노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문화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실버 영화제는 전북 정읍에서 열리는 '전국실버영화제'가 전부였지만, 올해 10월, 영화도시 부산이 여기에 가담한다. 전국 최대 규모로 열릴 실버영상영화제는 경로주간에 맞춰 10월 4일부터 7일까지 열리며, 노인들이 직접 만든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경쟁 부문과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기존 영화를 초청하는 형식의 비경쟁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참고도서>
존 로빈스의 100세 혁명, 존 로빈스 저, 시공사
노년의 역사, 조르주 미누아, 아모르문디
고령사회 2018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라, 프랑크 쉬르마허, 나무생각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