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나 프로젝트 공개, 일정 금액 후원 받고 성공하면 후원자에 보상주로 인터넷 통해 모금… 기업 거액 기부서 일반 소액 후원 중요성 알려

후원자들에 대한 보답으로 공연하는 이원국발레단
지난 14일,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는 기부자와 예술계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오광수)가 마련한 '문화예술 나눔의 밤' 행사를 통해 예술 분야에 기부해온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였다.

이번 행사에는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장실 예술의 전당 사장,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등 문화예술 및 재계 관계자와 지난 5년간 지속적으로 문화예술계에 기부해온 기업의 대표들이 참석해 기업의 기부 현황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이날이 뜻깊었던 것은 이 같은 기부 기업에 대한 감사의 시간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기업의 거액 기부 중심으로만 진행됐던 예술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일반 대중의 소액 후원을 통한 기부의 중요성을 알리는 시간이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의 출범식을 열고, 대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 창작과 기부의 새로운 시스템의 시작을 알렸다.

예술 기부의 새로운 요람 '크라우드 펀딩'

크라우드 펀딩의 출범을 알리는 오광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예술 분야에서의 크라우드 펀딩은 익명의 다수 후원자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모금 형식을 가지며, 주로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단체나 예술가가 펀딩 사이트에 자신의 프로젝트 계획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모금 목표액을 올리면, 일정 기간 동안 기부를 받는 방식이다.

기부자에게 주도권을 주는 것은 이 지점이다. 기존의 기부 방식은 창작물의 결과와 관계 없이 기부 자체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면, 크라우드 펀딩은 목표액 달성 시에만 기부된 금액을 예술단체에게 전달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한다. 목표액에 못 미칠 때에는 기부금을 기부자에게 돌려준다.

현재 기부영수증 발급 등 세제 혜택도 마련되고 있지만, 무엇보다 소액이라도 기부자들에 대한 감사 표시의 방안도 마련되고 있는 점이 기존의 기부와는 다른 측면이다. 이번 첫 번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박기원 설치미술가와 이원국발레단의 경우도 향후 작품 발표를 통해 후원자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계획이다.

박기원 작가는 조명전문회사 필룩스와 공조해 대학로 예술가의 집 옥상에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한 작품을 설치해 사회환원의 의미를 강조할 예정이다.

이번 후원금을 서울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6월경 열리는 <돈키호테> 공연의 의상비로 사용할 예정인 이원국발레단은 공연 오픈 리허설에 후원자를 초대하고 무대 투어의 기회를 주는 등 후원자에 대한 예우를 마련해뒀다. 단 All or Nothing 시스템에 따라 모든 계획은 이번 펀딩의 목표액인 500만 원의 달성 여부에 달렸다.

첫 번째 크라우드 펀딩 대상자인 박기원 작가와 이원국 발레단 단장
지난해를 문화예술 기부 확산의 원년으로 삼아 기부 활성화 사업을 추진해온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이번 크라우드 펀딩에 거는 기대는 크다. 지난 3월 초 별도의 전담부서인 예술나눔부까지 신설하고 자체 사이트 내에 별도의 기부 공간(fund.arko.or.kr)을 마련하는 등 민간 기부의 활성화 프로젝트에 힘을 싣고 있다.

오광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크라우드 펀딩이 성공할 경우 지원금이나 자체 후원 조성에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과 예술단체는 새로운 채널을 얻게 되고 대국민적으로도 소액 기부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참여도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민간 기부의 현재와 기부 환경의 변화

이번 크라우드 펀딩의 출발은 현재 예술 창작의 환경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민간 기부가 일반화되고 전체 기부의 비중을 높일 때 창작의 방향까지 바꿀 수 있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 예술 분야 기부는 압도적으로 기업의 기부가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일부 예술가들에게 경제적으로 윤택한 환경을 부여할 수 있지만, 전체 예술생태계의 다양성 면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그럼에도 민간 기부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부에 대한 인식 부족과 기부 환경이 충분히 조성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난 한 해 동안 기부금 현황을 집계한 결과 1666개처에서 총 134억 3500만 원이 기부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도 102억 3300만 원이 기부된 것에 비해 31%(31억 9천7백만 원) 증가한 수치로, 예술분야 기부가 점차 활성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법인 기부액이 125억 원으로 전체의 93.2%를 차지해 개인 기부를 압도적으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 예술 기부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민간 기부의 낮은 수치는 그대로 한 사회가 가진 사회문화적 특성과도 직결되는 것으로 결코 간과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허은영 연구원이 발표한 <문화예술 분야 기부 활성화를 위한 소고>에 따르면, 민간 기부가 발달한 나라들의 특징은 단순히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 때문이 아니라 기부에 대한 인식이 높다는 데서 공통점을 보인다.

소득공제 혜택이 생긴 1917년 훨씬 이전부터 민간 기부가 이미 활성화된 미국의 경우 사회적 필요에 대한 책임이 민간에 있다는 생각이 이미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으로 자리잡혀 있다.

따라서 미국은 개인들이 공동을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영리 단체를 스스로 조직ㆍ운영하는 전통이 뿌리내려 있다. 유럽 국가 중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민간 기부가 가장 활발한 영국의 경우는 미국만큼 민간 기부의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최근 독특한 기부 세제 혜택 방식을 도입하며 기부 활성화를 유도하고 있다.

예술 창작 푸원 대표 사이트 킥스티터
하지만 국내에서도 최근 모금의 생태계가 바뀌고 있다. 기부 선진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주고 끝나는 기부에서 다른 형태로 기부의 성과를 돌려받을 수 있는 '사회적 투자' 성격의 기부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셜 펀딩이다. 이번 예술 분야에서의 크라우드 펀딩 역시 이 같은 소셜 펀딩의 흐름에서 출현한 것이다.

'소셜 펀딩' 통해 확산되는 민간 기부

이처럼 새로운 기부 시스템으로 각광받고 있는 소셜 펀딩은 이미 해외에선 대중적으로 친숙한 존재다. 이번에 잘 알려진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과 '킥스타터'를 비롯해 '펀드레이징(Fundraising)', '마이크로 펀딩 (Micro funding)', '커뮤니티 펀딩(Community funding)' 등이 유명한 소셜 펀딩 사이트다.

이번의 크라우드 펀딩과 비슷한 형태의 모금 방식은 이미 국내에서도 시도되고 있었다. 네이버가 주관하는 해피빈(Happy Bean)도 크라우드 펀딩의 일종이고, 미투데이의 후원문화나 위키백과의 기부도 비슷한 형식이다.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주최사인 민트페이퍼와 파트너십을 맺은 소셜 펀딩 사이트 콘크리트도 한 달 전부터 대중음악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펀딩'이라는 용어 때문에 펀드나 투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그렇게 불편한 시스템은 아니다. 자신의 아이디어나 프로젝트를 공개해 먼저 일정 금액을 후원받고,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후원자들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이 바로 소셜 펀딩의 운영방식이다.

대중의 니즈와 예술가들의 창작 환경을 직접 연결시키는 이 방식은 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각종 문화예술 공연이나 단체에서 자금 조달을 위한 방법으로 사용돼왔다.

최근 국내에서 이 방식이 본격화된 이유 역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SNS 문화의 급격한 발전과 연관이 돼 있다. 인터넷 기반의 간편한 소액 결제가 가능해지면서 펀딩만을 위한 사이트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의 소셜 펀딩은 가난한 예술가들을 살리는 중요한 활로로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예술계에서도 부익부빈익빈 시대인 지금은 생존의 문제와 싸우고 있는 젊은 창작자들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가령 아무리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라고 해도 일정 수의 팬들이 있을 것이고, 이들로부터 소액의 후원금을 매년 꾸준하게 받아 활동한다면 예술가와 후원자들이 모두 '윈윈'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실제로 구현한 곳이 바로 대표적인 창작 후원 사이트 킥스타터(www.kickstarter.com)다. 창작자들이 이 사이트에 자신이 만든 작품을 소개하며 발매 가능 금액을 공지하면, 팬들은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 후원금을 송금한다.

이 같은 방식은 지금의 국내 예술계에도 적절히 들어맞는 구조다. 앞으로의 예술 창작의 향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번 크라우드 펀딩에의 반응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