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보살춤(사진제공=광주시립미술관)
친일·월북, 이념논란의 실체

한국 현대무용의 시원적 존재이자 신무용의 선구자인 최승희(1911~1969)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최승희는 일제강점기 국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코리안 댄서'라는 타이틀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여'민족의 춤'을 만방에 떨쳤다. 국제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하여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된 무용가는 최승희가 유일하다. 해방 후에는 1946년 월북해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북한 무용의 토대형성에 기여하고 민족무용극을 표방하지만, 1960년대 후반 숙청되는 비운을 맞는다.

최승희는 평생 이념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친일, 월북과 관련 늘 논란의 대상이 돼왔기 때문이다. 사실 최승희의 친일, 월북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최승희에게 씌워진 친일 혐의는 크게 세 가지다. 일제말기 황군위문 공연을 하고 국방헌금을 냈다는 점, 그리고 해외공연에서 '샤이 쇼오키(Sai Sho Ki)'라는 이름을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는다.

중국 경극에 출연한 매란방(왼쪽)과 최승희. 1943년(사진제공=연낙재)
일제강점기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게 세계적 무용가로 활동한 이름 있는 조선인 무용가가 일본이 요구하는 기부금 헌납이나 황군위문 공연을 거부하고 온전히 예술활동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승희는 40년대 초반 공연수익금의 일부를 독립자금으로 쓰여질 수 있도록 남편 안막을 통해 전달한 일도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독립군을 지원한 사실은 최승희를 일방적 친일론자로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다.

최승희의 활동 내력이 담긴 공연 포스터나 팸플릿을 보면,'崔承喜'라는 한자식 표기의 이름을 가장 선호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해외 공연에서는 '재패니스 댄서'가 아닌 '코리안 댄서'로 표기하여 자신의 주체성을 뚜렷히 하고자 했다.

최승희는 일본을 소재로 안무한 '무혼(武魂)'이라는 작품에 친일적 요소가 담겨있다 해서 비판되기도 한다. '무혼'은 일본 전통예능의 하나인 노오의 고전형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법을 혼융해 안무한 순수 창작 작품이다.

최승희는 30년대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후, 소위 '아시아 춤의 근대적 창출'을 화두로 조선을 넘어 일본과 중국의 전통에도 관심을 갖는다. 이에 따라 일본의 노오, 가부키를 비롯 중국의 전통무용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야네기 무네요시의 조선적인 선, 일본적인 색, 중국적인 형을 중시한 창작활동을 펼친다. '무혼'은 이렇듯 '조선적인 것'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작가적 세계관의 확장과정에서 탄생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작품창작으로 일본 지식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의 춤에는 '조선의 민족적 향기'가 담겨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따라서 최승희의 친일문제는 보다 유연한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또 다른 논란거리인 월북 역시 최승희의 이념에 따른 자의적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이념대립이 극심하던 당시 최승희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상반된 체제를 준비하던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로부터 동시에 소위 '러브 콜'을 받는다.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한 김일성은 세계적 무용가로 명성 있는 최승희를 북으로 데려가려는 시도로 월북한 남한 출신 연극인을 서울에 직접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그 무렵 최승희는 남한에 남아 계속 예술활동 해 달라는 내용의 이승만의 친필 편지를 받기도 한다.

최승희가 북행을 결정하기까지에는 우선 남편 안막이 먼저 평양에 가 있던 관계로 가족이 떨어져 살 수 없는 자연인으로서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술활동을 맘껏 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김일성의 유인 작전에 현혹된 것 같다.

남편의 종용과 김일성의 유인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북행을 결정하기까지 적잖이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민족의 정신과 얼이 담긴 민족무용을 창조하는 데 남은 무용인생을 바치겠다'는 포부를 밝힌 점이나, 북으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무당에게 점을 쳐보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얼마나 깊은 심적 갈등을 겪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월북 이후 최승희는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발판으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지내며 북한 무용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그러나 북한무용 초기 토대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최승희는 60년대 말 숙청되는 비운을 맞는다.

60년대 북한은 혁명적 주체무용 맹아기로 일대 전환의 시기였다. 주체예술을 표방한 북한 문화정책과 자유주의자로 창작의 자율성을 신봉한 최승희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게 되는데, 이는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결국 최승희는 주체무용을 반대하는 반당행위를 하였다는 것과 친일무용 행위, 그리고 자본주의적 잔재가 남아있다는 혐의가 씌워져 숙청된다.

최승희는 '무대는 최후의 결전장'이라고 여긴, 삶과 예술을 동일시한 예술가였다. 그녀는 예술과 정치의 분리론자였으며, 이념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6·25전쟁과 분단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국근현대사의 파고에서 최승희는 늘 주시의 대상이었다.

최승희는 살아 생전, 그리고 그 사후에도 이데올로기의 굴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비운의 무용가'였다. 한마디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최승희를 보는 '시선'의 확장

이제 탄생 100년을 맞는 만큼 최승희를 보는 시선도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 일본/식민지 조선'이라는 이항대립적인 구도 속에서 예술가들의 활동 역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모국의 개념으로 자리했던 일본은 조선에 서양의 선진화된 문물과 예술을 전해주는 일종의 '실크로드'였다. 최승희의 스승인 일본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를 통해 이식된 서양의 모던댄스는 이 땅의 춤의 형질을 변형시키는 강력한 무기로 작동됐다. 이시이 바쿠를 사사한 최승희는 '전통의 현대화', '춤의 세계화'를 구현하여 동양문화권 내에 머물던 한국의 춤이 세계 보편사적 지류에 놓여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최승희가 친일했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폄하한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자기부정'이다. 계보학상으로 볼 때 오늘의 한국춤은 신무용의 창시자인 최승희, 조택원을 정점으로 신무용 제2세대인 김백봉, 송범 등을 경유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친일 혹은 월북을 이유로 최승희를 거부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한국춤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최승희의 친일, 월북 혹은 이데올로기 문제는 보다 유연한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최승희를 지칭할 때에는 '동양의 진주', '반도의 무희', '한국의 이사도라 던컨', '전설의 무용가' '세계적 무희'등 화려한 수식어가 동원된다. 그만큼 최승희는 세계적 인물이었다.

'세계적 무희'라는 수식에 걸맞게 관점의 지평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최승희는 일제강점기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을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에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춤사조를 창출하여 세계무대로 진출, 우리 춤의 문화적 우수성을 만방에 떨쳤다. 그녀는 한마디로 한류 열풍의 선두주자였다.

영화배우, 모델로도 활약한 최승희는 신여성의 표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최승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단발머리는 '신여성=단발'을 상징한다. 훤칠한 키에 서구적 용모, 단발머리와 양장의 세련된 차림은 근대 서구적 이상을 동경한 대중들의 감성과 심미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전통적 인습과 굴레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신여성의 자의식과 자발적 선택에 의해 무용가의 길을 선택한 최승희는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근대 신여성으로서 실존성과 심미적 가치지향으로서의 최승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승희는 근대 가장 인기 있는 대중스타였으며, 한마디로 '근대'의 아이콘이었다.

자유주의자였던 최승희는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 이념의 노예가 되기를 철저히 거부했다. 따라서 그녀를 이해하는 관점도 이념을 넘어, 인간적 모습과 예술가적 업적에 초점을 맞춰 연구할 필요가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어 민족을 하나로 매개하는 데 있어 최승희는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경직된 남북교류의 물꼬는 트는 데 최승희가 긍정적 역할자로 거듭나길 희망해 본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choom@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