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사시대부터 최근까지 국악 관련 유물 200여 점 총망라

뼈피리
흔히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타임머신’이라고 표현한다. 유물들의 쓰임새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이나 가치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악기들은 선대인들의 예술관을 알 수 있는 타임머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국립국악원이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5월 10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고 있는 특별전 ‘우리 악기, 우리 음악’전은 이런 타임머신을 통해 우리 음악 역사로 여행하는 시간이다.

이제까지 국악기의 전시가 개별 공연에 관련된 것만 제한적으로 보여졌다면, 이번 전시는 선사시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국악에 관련된 유물 200여 점을 총망라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악기를 중심으로 악보, 서책, 회화 등이 한 자리에 모인 이 전시는 악기의 흐름과 변화를 통해 우리 음악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뜻 깊은 음악사적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소리가 음악이 되던 시기의 흔적

청동방울
이번 전시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음악’의 시작이다. 언제부터 소리는 음악이 됐을까.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발생한 악기들과 변화 과정이 담긴 전시 초입에서는 고대인들이 어떻게 소리를 음악으로 승화시켰는가를 보여준다.

현재까지 알려진 인류 최초의 악기는 뼈를 이용한 피리 종류다. 우리나라에서도 최초의 악기는 함경북도 웅기군에서 출토된 다. 놀랍게도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이 피리에 대해 구문경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피리의 형태로 보아 이미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피리로서의 형태가 등장하지 않았나 추정된다”고 설명한다.

고대국가가 세워지기 이전의 악기들은 대개 제의와 관련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도 등장한 여러 형태의 들은 선사인들의 제천의식과 축제의 음악에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농사를 짓던 시기에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모양의 찰음악기는 초기 철기 시대에 이미 노동요가 있었던 증거라서 놀라움을 준다.

우리 악기가 지금의 모습과 비슷하게 된 것은 주변 나라들과 교류를 시작하며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면서다. 삼한시대 처음 출현했다는 현악기는 후한서 동이열전이나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도 등장한다. 전시장에 있는 당시의 악기는 비록 몸통이 세로로 잘라져 절반만 남아있지만, 윗부분의 구멍은 줄을 고정하기 위한 현악기의 흔적을 보여준다.

음악의 틀을 갖추다

고구려 무덤 벽화
고구려 음악과 악기의 모습은 무덤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벽화는 주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그림이지만, 관악기와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많은 그림들은 이때부터 음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지난해 국립국악원의 고악기 연주회에도 등장했던 백제금동대향로에는 놀랍게도 오늘날의 오케스트라 구성과 닮은 듯한 다섯 명의 악사가 발견된다. 소, 피리, 완함, 거문고, 북으로 이뤄진 악단은 향로에 세밀하게 새겨져 있다.

신라 토우에는 당시 신라인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까지 드러나 있다. 구문경 학예연구사는 “삼국통일 후 신라는 가야, 고구려 등 주변 나라의 문화도 흡수, 통합하면서 고대 음악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삼국통일 후 불교문화가 절정에 이르던 통일신라 시대에는 종교의례와 연관된 악기의 흔적들이 다수 발견된다. 특히 전시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天人)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부처의 모습을 닮은 천인들은 각각 비파, 동발, 피리, 요고 등의 악기를 들고 연주하고 있어 당시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던 음악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 피리로 세상을 평안하게 하다

영화 <전우치>에서는 요괴와 신선, 도사들이 시간을 초월한 전쟁을 벌인다. '(萬波息笛)'이라는 피리 때문이다. 그 뜻은 '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는 모든 싸움의 발단이 된다.

백제금동대향로에 나와 있는 다섯 악기
영화의 모티프가 된 이 피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실존하는 악기다. 신라 신문왕 때 만들어진 은 영험을 가진 신라의 보배로, 경주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되었다. 훗날 조선의 연산군은 이에 관심을 갖고 경복궁으로 가져오려고 하지만 문경새재를 넘자 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피리로 세상을 평안하게 하려는 신라인들의 생각은 악기가 곧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 유물 중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들이 유독 많은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우리 음악과 발전과 향유

한편 이번 전시에는 악기뿐만 아니라 당시의 음악이 담긴 서책과 회화도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특히 예악 사상을 중시했던 조선 시대의 서책과 회화에는 우리 문화의 황금기가 어떤 인물과 제도에 의해 성립되고 발전했는가가 단적으로 나타난다.

세종대의 악기와 당시의 기록 등은 유교사상에 기반을 둔 궁중음악이 체계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의 핵심인물인 박연은 아악 연주에 필요한 편종과 편경을 만드는 한편, 동양 최초의 기보법인 <정간보>를 창안하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이와 함께 오늘날에도 국악과 전통춤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는 음악이론서 <악학궤범>도 함께 공개된다.

만파식적
그림 속에 표현된 악기들도 당시 음악상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1848년)은 궁중의례의 정수인 ‘연향’속의 음악을 충실히 재현한다. 또 김홍도가 그린 <무동(舞童)>과 여기에 그려진 삼현육각(三絃六角)의 악기(피리, 해금, 대금, 북, 장구)들도 함께 전시돼 있어 그림 속의 악기 모습을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다.

‘선비들의 악기’로 알려진 거문고는 이번 전시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궁중의 음악을 담당했던 장악원과 그 악사들에 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거문고 악보인 <금합자보>(보물 제283호)는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또 지난해 공연을 통해서도 일반에 알려진 윤선도의 고산유금을 비롯해 김일손의 탁영금, 이형상의 병와금, 류홍원의 양양금, 옥동 이서의 거문고, 이신의의 석탄금 등 크기나 모양도 천차만별인 다양한 거문고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송상혁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는 “시기도, 지역도, 소유자도 제각각인 거문고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문중의 도움과 양해 덕분”이라며 “선비들이 자기만의 애정을 담아 새긴 글귀나 흔적을 눈여겨보면 색다른 재미가 있다”고 관람 포인트를 조언했다.

박일훈 국립국악원장은 “우리나라 유무형 문화유산의 보고인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국악원이 함께 기획한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 악기와 음악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신진찬도병
금슬도 우리 악기에서 나왔다?

국악기가 우리 일상과 가까웠다는 역사적 증거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서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금슬이 좋다'는 표현이다. '금슬'은 우리 악기 중 금(琴)과 슬(瑟)이 항상 함께 편성되어 연주됐던 것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고구려 때 진나라에서 들어온 금은 7개 줄로 이뤄진 현악기로, 줄 중간에 받침대가 없어 음색이 맑고 청아하다. 반면 25개의 줄로 구성된 슬은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다 12세기경 우리나라에 들어온 현악기. 두 마리의 학이 구름과 함께 화려하게 그려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재는 문묘제례악에서 연주되고 있는 두 악기는 지금까지도 항상 함께 편성되며 여전한 화음을 자랑한다. 때문에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안 되는 금슬은 자연스레 시간을 초월해 좋은 관계를 상징하는 악기가 됐다.


김홍도의 '무동'
문묘제례악에서 연주되는 금
문묘제례약에서 연주되는 슬
거문고(탁영금 외)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