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생채식, 로컬푸드… 건강 열풍에 마침표칼과 양념 최소화는 최고의 식재료에 대한 예의

'뜰 안의 작은 행복' 음식점 야생 돌나물 무침
지난 4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50곳을 선정하는 'the world's 50 best restaurant 2011'의 순위가 발표됐다.

영국의 '레스토랑 매거진'이 각국의 유명 셰프들과 음식 평론가 등 전문가 4000여 명을 대상으로 매년 실시하는 이 국제적인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곳은 코펜하겐에 있는 테이블 12개의 작은 식당 '노마'. 그곳의 헤드 셰프로 이제 불과 32살인 르네 레드제피는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으로 노마를 최고의 레스토랑 자리에 올려 놓았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 미식 대국의 자존심을 한방에 무너뜨린 노마의 음식은 북유럽 지역에서 제철에 나는 재료만 고집한다는 것(토마토도 올리브 오일도 안 쓴다) 외에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채집이다. 재배한 식물이 아닌 야생에서 멋대로 자란 식재료를 주워다가, 또는 캐거나 따다가 사용하는 것. 노마는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채집 전문가 집단'과 연결돼 있을 뿐 아니라 요리사들이 직접 산과 들로 나가 식재료를 구해온다. 레드제피 역시 종종 코펜하겐 인근의 숲으로 나가 버섯과 블루베리 등을 채집해 가지고 온다.

웰빙 열풍의 끝, 채집

코펜하겐 '노마'의 음식
"비바람과 추위를 전부 이긴 강한 놈들입니다. 사람 손에서 오냐오냐 약하게 자란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21세기 음식 문화의 절대 화두는 건강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건강한 음식, 깨끗하게 자란 식재료, 이것들을 가능케 하는 친환경 농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유기농, 생채식, 로컬 푸드가 차례로 이슈가 됐고, 여기에 마침내 건강 열풍에 마침표를 찍을 '웰빙 종결자'가 등장했으니 다름 아닌 채집 음식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산과 들에서 온갖 악천후를 견디며 자란 이 야성의 식물들은 자연식 운동가 민형기 대표에 따르면 '애당초 모든 식물이 받아야 할' 자연의 정기를 남김 없이 간직한 최고의 식자재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잡초처럼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들답게 모양도 울끈불끈 터프하기 짝이 없다.

"관행 농업으로 키운 채소보다는 당연히 유기농이 몸에 좋지요. 하지만 아무리 유기농으로 키웠다고 해도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다릅니다. 재배 식물과 야생 식물은 맛과 영양, 약효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납니다."

채집 음식, 즉 포레이징 푸드(foraging food)의 개념을 처음으로 알린 것은 미국의 유엘 기번스다(물론 원시 시대의 수렵 채집 방식이 미국인의 일반적인 음식 섭취 경로에서 완전히 밀려난 후를 말한다). 1930년대 건조한 모래 폭풍이 미국의 초원을 바싹 말려버린 이른바 '더스트 보울'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머니로부터 야생에서 채취할 수 있는 식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전수받았다.

임지호 셰프의 '산당'
하천을 따라 나는 벗풀, 길가에서 잡초처럼 자라는 우엉, 습지에 포복해 있는 덩굴 월귤(크랜베리)까지,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먹을거리였다. 기번스가 1962년 펴낸 책 <야생 아스파라거스 스토킹>에는 이 같은 야생 식물 조리법과 함께 그가 처음으로 채집에 눈 뜬 순간이 기록돼 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어느 맑은 토요일 저수지에 고기를 잡으러 가던 유엘은 우연히 수로 둑을 따라 돋아난 아스파라거스 무리를 발견한다. 어느새 물고기도 잊은 그는 아스파라거스를 뜯기 시작했고 이른 봄부터 6월까지 매일 같이 그 도랑에 찾아갔다. 밑동을 바싹 잘린 아스파라거스는 뜯어도 뜯어도 계속해서 여린 새순을 밀어 올렸다.

"내가 씨를 뿌려서 가꾸지도 않은 곳에서 무언가를 수확한다는 개념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우리의 산과 들은 '샐러드 밭'

한국에서도 대량 생산에 밀려 채집이 사라진 지는 오래지만 아직도 깊은 시골에 가면 산과 들에서 식물을 채취해 자족하거나 소규모로 판매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리의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야생 식자재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

너무 흔해서 가치를 잊은 고사리, 쑥, 냉이, 달래 외에도 장아찌 재료로 좋은 가시오가피와 야생 두릅, 쌈으로 싸먹으면 맛있는 생강나무 잎과 청미래 덩굴 잎, 무쳐서 먹으면 이뇨 작용을 돕는 찔레순, 그리고 산도라지, 산더덕, 뽕나무의 잎과 뿌리, 돈나물, 씀바귀, 고들빼기, 다래순, 도토리, 싸리 버섯, 상황 버섯, 연근, 야생 돼지감자, 야생 사과, 야생 호박 등등.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간과해선 안 된다. 야생 쇠미역, 톳, 다시마 등 각종 해초류는 물론이고 자연산 석화와 도미, 농어도 모두 채집 음식에 포함된다. 채집 식물은 식물(植物)이 아니라 식물(食物)이기 때문이다.

'방랑 식객'으로 알려진 산당 임지호 셰프는 아예 채집 음식의 기준을 무너뜨린다. 그는 산과 들을 다니며 잡히는 대로 요리에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선택한 것 중에는 머루처럼 일반적인 식자재도 있지만 측백나무나 낙엽, 마의 씨, 메뚜기, 밤 껍질 등 보통 못 먹을 것으로 여기는 것들도 종종 있다.

산당의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밤 후람베는 그가 직접 산에서 주워 온 밤송이 위에 삶은 밤을 올리고 와인 소스를 끼얹은 다음 불을 붙이는 화려한 음식이다. 이렇게 하면 밤 껍질이 타면서 그 연기가 밤에 스며들어 훈제한 듯한 군밤 맛이 완성되니, 밤송이를 단순한 그릇이 아닌 식재료로 활용한 셈이다.

이처럼 자연 속에 널린 듯 숨어 있는 포레이징 푸드는 셰프의 창의력과 신선한 재료를 향한 욕심에 불을 붙이는 주인공이지만, 현재 국내에서 채집 음식을 접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노마의 헤드 셰프 르네 레드제피
"채집 음식은 상품으로 재배된 것이 아니라서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요. 재료 손실이 많다는 뜻이죠. 게다가 뒤뜰에서 자란 것을 뜯어다 파는 소상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문 상인에게 하듯이 일정 수준의 품질을 요구하기도 힘들어요. 여기에 더덕 5kg 당 50만 원 선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도 부담이죠."

국내 최초로 포레이징 푸드 레스토랑을 표방한 클럽 모우 최창오 셰프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채집 음식은 유럽처럼 한 끼에 몇 십 만 원을 호가하는 초특급 레스토랑을 지향하든지, 아니면 아예 산자락에 작은 식당을 열어 본인이 직접 캐서 운영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 국내에서 채집 음식을 선보이는 곳도 식당에 농장이 딸려 있어 운영자가 수시로 방문해 채집한다든지, 영리 외에 다른 목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비용을 감수하며 조심조심 공수해온 재료들에는 보통 최소한의 조리가 동반된다. 봄에 나는 채소를 1년 내내 먹기 위해 절임으로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짝만 익히거나 아예 재료 그대로 내기도 한다. 최 셰프는 재료 맛을 해칠까 봐 간을 약하게 하고 고추장처럼 강한 양념은 사용하지 않는다.

"칼과 양념을 최소화하는 것은 최고의 식자재에 대한 예의죠."

도산 공원 '클럽 모우'
5월은 산과 들의 야생 식물들이 한창 진한 향을 뿜어내는 때다. 민형기 대표는 등산할 때 산나물과 들나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가면 비싸고 귀한 채집 음식을 공짜로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씀바귀니 달래니 고들빼기니, 전부 지금이 한창입니다. 눈으로 구별할 수만 있으면 전부 채집할 수 있죠. 굳이 유명한 산이 아니더라도 구룡산처럼 인근의 야트막한 산도 아주 훌륭한 채집처입니다."

물론 절제가 필요하다. 민 대표는 채집이 '약탈'이 되지 않도록 당부한다. 몸에 좋다면 씨를 말려 버리는 한국인들의 근성을 염려해서다.

"한두 끼 먹을 분량만, 자연에서 은혜를 얻는다는 마음으로 채집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산은 우리의 허파입니다."


패션의 거리로 조용히 변신 중인 서울 청담동 도산공원 근처에 재작년 10월 '클럽 모우 서울'이 문을 열었다. 오는 11월 강원도 홍천에 오픈 예정인 친환경 골프장 '클럽 모우'의 멤버스 라운지이면서, 동시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포레이징 푸드를 전면에 내세운 웰빙 레스토랑이다.

유기농 한식 뷔페 '청미래'
일본 핫토리영양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현지에서 경력을 쌓은 최창오 셰프는 레스토랑 오픈을 위해 한식 요리 연구가인 이종국 셰프와 함께 전국의 재래시장을 돌며 믿을 만한 채집 음식 공급처를 만들어 놓았다.

현재 클럽 모우에 식재료를 대는 인력은 총 3명. 이 중 두릅, 더덕, 연근, 호박 등을 공급하는 2명은 그야말로 시골 할머니로, 텃밭과 인근 들에서 자생하는 채소들을 캐다가 지역장에 내다팔기도 하고 서울로 올려 보내기도 한다. 나머지 한 명은 해산물 담당으로 자연산 도미와 농어, 문어 등을 구해준다.

최 셰프가 선보이는 음식은 퓨전 한식에 일식을 살짝 가미한 것. 메인 디쉬는 일반 레스토랑처럼 한우 스테이크가 차지하지만 애피타이저와 생선 요리에는 채집 식자재를 다양하게 사용한다.

산더덕을 넣어 끓인 수프나 키조개 껍질 위에 야생 두릅, 달래, 제주도 유채꽃, 구운 조갯살을 올린 키조개 샐러드 등 채집 재료의 진한 향을 살리는 방향으로 조리한다. 현재 포레이징 푸드의 비중은 50% 정도지만 향후 골프장이 개장되면 인근에 농원을 구성해 100% 채집 음식 레스토랑으로 변신할 계획이다.

1층은 레스토랑, 2층은 개별 룸, 3층은 야외 바로, 자연친화적이면서 세련된 인테리어가 음식과 잘 어울린다. 골프 클럽 회원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어졌지만 비회원이라도 하루 전에 예약하면 1층 레스토랑을 이용할 수 있다.

야생 쇠미역, 야생 두릅 장아찌 등 채집 음식

건강식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민형기 대표 역시 25년 전 병원으로부터 심각한 판정을 받았다.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식이요법만으로 병을 극복한 그는 '밥이 약'이라는 굳건한 신념을 주변에 전파하다가 결국 유기농 채소와 채집 음식, 현미로 구성된 뷔페 식당 청미래를 차렸다.

그가 정의하는 자연식은 우리 땅에서 제철에 거둔 유기농 식물과 현미밥으로 차린 전통 식단이다. 장장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몸을 살리는 음식에 골몰하다 보니 자연히 약초나 산나물을 전문으로 캐는 사람들과 각별한 연을 맺게 됐고 현재 이들이 청미래의 채집 식물 공급원이 되었다.

민 대표의 친형제들 중 셋째 누이와 다섯 째 누이는 동해 최북단 휴전선 근처에서 일하는 해녀로, 야생 쇠미역을 비롯한 각종 해초와 자연산 홍합, 성게 등을 채취해서 보내준다. 여기에 민 대표가 서울 근교에 있는 농장에서 직접 채집하는 것들도 상당수다.

"이게 어제 따온 다래순입니다. 8년간 숙성시킨 약된장에 무쳐서 나물로 먹으면 이열, 혈압, 당뇨에 탁월한 효과가 있죠."

그 자체로도 몸에 좋은 야생 가시오가피와 두릅, 적근대는 여기서 또 다시 8년간 발효한 토종콩 약된장과 3년간 숙성시킨 매실 된장, 10년 동안 발효한 간장 소스 등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약에 버금가는 음식으로 재탄생한다.

된장에 무친 다래순
5가지 해초로 만든 해초묵, 야생 다시마로 만든 정과, 뽕나무 잎, 줄기, 뿌리를 전부 넣어 달인 뽕나무 차 등 재료를 가공하는 방식도 다양해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유기농 뷔페라 풀만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민 대표가 내린 결론 중 하나는 곡채식 80%에 동물식 20%가 민족의 체질과 정서에 맞다는 것. 오징어 야채 불고기와 도미 찜, 참조기 구이 등 육식과 막걸리 찐빵, 유기농 사과 등 후식까지 포함해서 약 60여 가지의 자연식을 선보이고 있다. 점심은 1만 5000원, 저녁은 2만 원. 월요일은 쉬며 공휴일에도 영업한다.

명동 '뜰 안의 작은 행복'

자장면, 돈가스, 칼국수로 유명한 명동은 의외로 깔끔한 '집밥' 먹을 곳 찾기가 쉽지 않다. 바깥에서 안심하고 밥 먹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명동 성당 근처에 있는 '뜰 안의 작은 행복'은 거의 유일한 선택이다.

식당에서 사용하는 식자재의 대부분은 양평에 위치한 1500평 넓이의 농장에서 나온다. 하우스 농사 대신 100% 노지 재배를 고수하는 조한석 대표는 제초제를 전혀 쓰지 않고 고집스럽게 호미로 일일이 김을 매가며 배추, 고추, 마늘, 콩, 상추 등을 재배한다.

봄이 되면 인근 들에서 자라는 달래와 돈나물, 냉이, 고사리를 뜯어서 서울로 가지고 온다. 냉이와 달래는 된장찌개에 넣어 향을 돋우고 달래 뿌리는 장아찌로 담그며, 돈나물은 무치기도 하고 물김치에 넣기도 한다. 식당 전체의 맛을 책임지는 이는 대표의 어머니로 명동 성당에서 8년간 식복사로 근무했다.

떡갈비 정식
그가 직접 담근 된장과 간장은 주방에서 조미료를 몰아낸 일등 공신이다. 진하면서 짜지 않은 집된장과 집간장은 그 자체로 모든 찌개와 나물에 부족함 없는 양념이 된다.

이곳에서 만드는 채집 음식의 진수를 맛 보려면 코스로 나오는 저녁보다는 점심 식사를 추천한다. 곤드레밥 정식, 코다리 정식, , 3가지가 있는데 여기에 깔리는 6가지 밑반찬에 제철에 채집한 싱싱한 채소들이 사용된다.

바로 어제 뜯어 왔다는 돈나물은 매실과 고추장, 식초, 고추가루를 넣고 달콤새콤하게 무쳤다. '아삭'하고 한 입 씹으면 잔뜩 머금었던 물기가 입 안에 상큼하게 퍼진다. 달래 뿌리로 담근 장아찌는 단단한 식감에 강렬한 맛으로 입맛을 확 돋운다. 점심은 전부 예약제로 운영되며 오전 10시까지 예약을 받는다. 매주 일요일은 휴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