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라이팅', '하이퍼 파사드' 등 화려한 볼거리 위해 경쟁적 도입첨단 기술, 무대언어로 잘 녹여야 관객에 감동과 만족 줄 수 있어

비보이 퍼포먼스 '마리오네트'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하기 위한 공연들의 경쟁이 잇따른 첨단기술 도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신체를 바탕으로 아날로그적 극 전개를 정체성으로 삼아온 무대예술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이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에만 치우친 공연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홍보 방향부터 기술력에 초점을 맞춘 공연들은 관객의 기대치를 어느 정도까지 만족시키는가가 관건이 됐다.

그렇다면 최근 등장하고 있는 공연들은 어떻게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있을까. 기존의 무대를 보완하려는 시도들이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방식을 따라가봤다.

비보잉과 오페라를 새롭게 읽는 코드

현란한 기교를 보여주는 비보이들이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이야기를 펼치는 퍼포먼스 <마리오네트>. 세계적인 비보이 그룹 '익스프레션 크루'가 2006년 초연한 이후 오픈런으로 공연 중인 이 작품은 해를 거듭할수록 내용과 형식 면에서 질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사랑의 묘약'
이런 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3막인 '마법사 그리고 마지막 공연'. 여기서 <마리오네트>는 오직 흰색만 반사시키도록 고안된 특수 조명장치 '블랙 라이팅(Black Lighting)'을 사용해 신비스러운 느낌을 연출한다.

블랙 라이팅은 공연 전반에서 사용되지만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3막의 '야광 가면쇼' 부분에서 매혹적인 빛으로 관객들을 탄성을 이끌어낸다. 한 공연 관계자는 "63아트홀로 옮긴 후에는 공연장의 자이언트 스크린 영상이 뒷받침돼 공연이 한층 더 화려해졌다"고 설명한다.

못을 박은 장치 구조물이 등장하던 오페라 무대에서도 영상기술이 전격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실험의 중심에는 도니체티의 희극 오페라 <사랑의 묘약>이 있다. 먼저 국립오페라단의 이소영표 <사랑의 묘약>은 극의 배경을 현실세계에서 우주 무대로 승화시키는 파격적인 발상으로 구태적인 오페라 연출을 탈피해 주목받고 있다.

영상기법으로 만들어진 천체의 별들이 배경으로 등장할 때 기존의 오페라 팬들은 낯설어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어냈다고 호평하는 평자들도 적지 않다.

또 하나의 새로운 <사랑의 묘약>은 삼성동 올림푸스홀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다. 소극장 오페라의 특성상 소규모 악단이 들려주는 음악은 아리아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를 보완하는 것은 영상기술이다.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이어지는 샌드 아트는 오페라 공연에서는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한다.

호암아트홀 '메트 오페라 온 스크린'
한편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오페라 <카르멘>을 3D영화로 제작해 극장에서 상영한 것처럼, 국내에서도 외국 오페라를 고화질의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고 있다.

호암아트홀이 3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메트 오페라 온 스크린'이 그것이다. 호암아트홀의 한 관계자는 "HD급 화질의 4배에 가까운 고해상도 4K디지털시스템으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준비 중이다"라고 밝혔다.

3D, LED 기술 앞세운 연극, 뮤지컬, 퍼포먼스

17일부터 앙코르 공연되고 있는 연극 <나는 너다>는 안중근 의사의 삶을 조명하는 역사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첨단 입체영상기술인 '하이퍼 파사드'를 도입해 눈길을 끈다. 대형 배경 스크린에 투영된 뤼순 감옥과 하얼빈 거리 등의 역사적 상징물들은 교훈적인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고 실감나게 묘사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쓰이고 있다.

지난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의 호평을 기반으로 여름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비빔 인 서울>은 국내 공연 사상 최초로 첨단 3D 프로젝션 맵핑(mapping) 기술을 적용해 화제가 됐다.

하입리드 퍼포먼스 '비빔 인 서울'
비트박스와 판소리, 힙합과 한국춤, 사물놀이 등이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이 공연은 제목처럼 다른 장르의 예술이 모여 새로운 맛을 내는 하이브리드 퍼포먼스를 표방한다.

공연의 각본을 맡은 이재국 프로듀서는 "3D 맵핑 기술을 도입하여 무대를 수시로 변하게 해서 지루하지 않은 공연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하며 "서울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부서지고 무대 위에서 경회루가 무너져내리는 3차원적 입체감이 이 기술의 힘으로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뮤지컬 <원효>는 제작 초기부터 아예 '하이테크 뮤지컬'을 표방하며 화제를 모았다. 최첨단 테크놀로지 기법을 통해 미래적 디자인으로 꾸며진 무대미술은 그 자체로 해외수출을 겨냥한 마케팅 기법이 됐다.

이 같은 방식은 제작사의 전작인 뮤지컬 <선덕여왕>에서도 그대로 사용된 바 있다.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보여주며 가장 한국적인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제작진의 야심은 LED-TV 첨성대로 표현되며 시선을 모았다.

이번 <원효>에서도 테크놀로지의 정점은 디지털 황룡사 9층탑으로 나타난다. 또 해골물을 마신 원효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우치는 장면 역시 미술 세트가 아닌 테크놀로지적 기법으로 표현되며 익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한다.

연극 '나는 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용의 깊이가 기술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면도 함께 보인다. <원효>가 진정한 한국형 뮤지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첨단 테크놀로지에 걸맞은 스토리텔링과 짜임새 있는 극 전개의 보완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퍼포먼스를 표방하고 있는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공연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3D 맵핑 프로젝션과 홀로그램 기술 등을 극중 인물 표현에 적용하고, 영상과 배우가 상호작용하는 동작인식 기술까지 도입해 원작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이 결과 기존의 유머러스한 아이디어와 감옥 탈출의 줄거리가 보다 실감나게 표현되어 젊은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특히 도심 탈주 장면에서 무대 전체에 투영된 밤거리는 3D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러나 기술의 분배가 공연 전반에 고루 분배되지 않고 후반부에만 배치된 점은 아직까지는 제목의 'VR'에 못미치는 부분이다. 원작이 가졌던 유머러스한 아이디어와 아날로그적 매력에 이를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가 업그레이드 버전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할 전망이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뛰어난 무대기술로 지난해 한국뮤지컬대상과 뮤지컬 어워드를 평정한 <영웅>의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는 "무대를 보러 온 관객이 어느 선까지의 영상을 원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가상현실 퍼포먼스 'VR 브레이크 아웃'
이는 아무리 기술력이 출중해도, 그 영상을 활용한 표현 방식이 무대언어로 잘 녹아야만 관객들에게 감동과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교훈을 시사하고 있다.


뮤지컬 '원효'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