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랙티브 북, 전자책, 닷코드, 라이브 북 등 쏟아지는 신기술새로운 책의 형태,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제기

강애란의 'The Luminous Poem', 2011
"인터넷으로 인해 과연 책이 사라지게 될까요?" 대담집 <책의 우주>에서 움베르트 에코가 묻고 답한다. 결론은 "아니다"다. 컴퓨터보다 눈이 덜 피로하고, 전기가 필요하지 않으며, 욕조나 침대에서도 읽을 수 있는 "유연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터넷 덕에 우리는 오히려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로 되돌아왔다.

"한동안 우리는 이미지의 문명으로 진입했다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인터넷으로 인해 다시 알파벳의 시대로 되돌아왔습니다. 모든 사람은 글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읽기 위해서는 매체가 있어야 해요. 물론 컴퓨터도 이 매체가 될 수 있지만 두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읽노라면 두 눈이 테니스공처럼 부풀어 오를 겁니다. 우리 집에는 이러한 모니터를 장시간 사용할 때 눈을 보호해주는 안경까지 있지요."

그래서 다다른 예측은 둘 중 하나다. 책이 독서의 주요 매체로 남게 되든지, 아니면 책과 비슷한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든지. 설령 책장이 더 이상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신기술로 펼쳐진 책의 지평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해온 책의 효용은 단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습도 연관된다.

리디북스의 소셜e북
책을 통해 이어진 지식과 지혜에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고, 인쇄된 글자를 눈으로 따라가고,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가끔 숨을 멈추고, 책과 나 사이의 공간을 의식하는 인식 과정이나 되새기고 싶은 구절에 밑줄을 긋고, 책장의 책을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해 놓는 활용법까지 담겨 있다.

새로운 기술이 제시하는 새로운 책의 형태가 종이책의 전통을 대체할 것이라는 떠들썩한 전망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질문은 읽고 쓰는 관습의 적절함, 나아가 책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로까지 넓어져야 한다.

독자이자 저자인 우리는 한동안 기술의 가능성과 전통의 입증된 효용 사이 밀고 당김에 휘말려 있을 것이다. 둘 중 무엇도 온전히 승리하거나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관습은 넓어지고, 타협점을 찾을 것이다. 업무에 참고할 문서는 태블릿PC에 저장하고, <전쟁과 평화>는 기어이 종이책으로 읽는 식으로.

인터랙티브 북과 전자책, 닷코드와 라이브북 등 신기술로 펼쳐진 책의 지평은 우리에게 책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디지털 부호가 아니라, 지하철에서 읽을거리에 몰두하고 있는 직장인, 교과서를 십자가처럼 지고 다니는 학생, 주민에게 인기 있는 도서관과 귀퉁이를 접은 책들로 가득한 당신의 책장에 뿌리 내린 상상력만 살아남을 것이다.

친구와 공유하는 책 읽기

네오랩컨버전스의 닷코드 기술을 활용한 세일러 펜 시스템 다이어리
"O God! can I not grasp/ Them with a tighter clasp?/ O God! can I not save/ One from the pitiless wave?"

선반 위에 책을 올려놓자 방 전체가 에드거 앨런 포의 시로 가득 찬다. 어디선가 들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벽에 영사되는 큰 글자로 한 구절 한 구절이 나타난다. 방 가운데에는 관객이 들어갈 수 있는 책 모양 공간이 있다. 그 안에 있으면 책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읽는 기분이다.

갤러리시몬에서 열리고 있는 강애란 작가의 미술전시 'Luminous Poem'의 한 장면이다. 비밀은 책 모양 오브제와 선반이다. 셰익스피어, 랄프 에머슨, 존 밀턴 등 작가 이름이 적힌 오브제에는 그들의 영시가 저장되어 있고, 센서가 내재된 선반이 그 데이터를 작동시킨다. 책을 통해 전해진 문학을 새롭게 감각하도록 만드는 이 기술을 작가는 '인터랙티브 북'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술작품이지만, 공간만 바꾼다면 충분히 현실적이다. 아이가 잠들 때까지 엄마 대신 동화를 들려주고, 다채로운 색과 서체로 내용을 해석해주는 책을 떠올릴 수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무대를 옮긴 전자책은 디지털 기술의 주특기인 상호작용성을 책에 불어넣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자책 서비스 리디북스(www.ridibooks.com)는 최근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연동한 '소셜 e북'을 선보였다.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발견하면 클릭 한 번으로 바로 페이스북, 트위터, 미투데이 등에 올리거나 이메일로 보낼 수 있다.

강애란의, 'Digital Book Project', 2011
이런 기술은 으레 고독한 행위였던 독서의 개념을 깨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블로그와 미니홈피의 활성화가 사진 찍기의 목적을 기억에서 공유로 옮겨 놓았듯, 상호작용성이 강조된 전자책도 독서에 또 다른 의의를 추가하게 될까. 리디북스는 앞으로 SNS를 통해 연결된 이들이 읽은 책, 선택한 구절을 바탕으로 다른 책을 추천하는 기능도 제공할 예정이다.

종이책, 독자를 향해 진화하다

한편에선 종이책의 진화도 진행 중이다. 작년 출간된 'EBS 깨미 생각동화 콕'의 곳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숨어 있다. 펜 모양의 리더기로 찍으면 비로소 소리가 나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에 이미지가 나타난다. 닷코드 기술 덕이다.

네오랩컨버전스의 닷코드 기술은 종이 표면에 미세한 점으로 구성된 코드를 인쇄해 정보를 담고 하이퍼링크를 거는 것. 리더기가 닿으면 잠재성이 실현된다.

무궁무진한 응용이 가능하다. 종이책이 외국어 문장을 원어민의 음성으로 읽어주고, 난해한 수학 문제를 해설해주고, 악보를 연주해주고, 관련 동영상을 보여주고, 특정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로 데려다줄 수 있다.

네오랩컨버전스의 닷코드 기술을 활용한 영어 교육 교재
거꾸로 독자의 정보를 수집해 분석할 수도 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독자들이 빈번히 클릭하는 부분을 통해 반응을 살필 수 있으며, 자녀에게 학습 교재를 사준 부모는 진도를 확인할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문제, 학급의 수준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을 활용해 어학원용 교재로 개발되기도 했다.

닷코드 기술이 종이책의 종말을 전제한 디지털 기술과 가장 다른 점은, 오랫동안 최적화된 독자와 종이책 간 관계를 생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하는 부분을 찾을 때는 여전히 스크롤보다 손가락으로 책장을 드르륵, 넘기는 게 편하다. 나름의 습관대로 메모하고, 밑줄 긋고, 접은 종이책 내용이 잘 이해되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종이책은 디지털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모든 이에게 다정하다. 스마트폰 앞에서 쩔쩔매던 할아버지도 닷코드 기술이 내장된 종이 매뉴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닷코드 기술이 결합된 점자책은 시각장애인에게 유용할 것이다.

이런 종이책의 효용은 다른 제품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일본에서 판매되고 있는 '세일러펜 시스템 다이어리'에는 사용자가 직접 닷코드에 음성 정보를 입력하는 기능이 추가됐다. 리더기로 다이어리를 눌러 목소리로 스케줄을 녹음하고, 꺼내들을 수 있다. 네오랩컨버전스는 일본의 한 케이블TV 회사와 함께 종이 리모컨도 개발 중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는 종이책에 디지털 콘텐츠를 결합시킬 수 있는 '라이브북'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프로젝터와 카메라로 구성된 프로젝션 컴퓨터를 이용해 종이책 위에 디지털 정보를 표현하는 원리. 스마트폰, 컴퓨터 화면 등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었던 증강현실(현실세계에 가상세계가 겹쳐 보이는 것)의 무대를 종이책으로 옮기는 것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개발 중인 라이브북
스마트인터페이스연구팀 정현태 연구원은 "책과 컴퓨터를 번갈아가며 사용하지 않고도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용자가 콘텐츠에 몰입하기가 쉬워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로젝션 컴퓨터는 크기와 무게를 최소화해 착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별도의 장치 없이 손가락으로만 터치해도 디지털 정보가 반응할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손끝을 추적하는 인식 기술도 포함된다. 2013년에 상용화될 예정.

상호작용적 전자책 쓰기

책의 변화는 읽기뿐 아니라 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쇄의 과정이 생략된 전자책은 출판의 규칙, 저자의 역할과 범위까지 바꿀 수 있다. 종이책과 구분되는 지점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가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17일 열린 디지에코 오픈세미나 '우리나라에 E-book 시대는 언제, 어떻게 올까?'에서 티엔엠미디어 명승은 대표는 전자책 시장의 성장이 자가 출판을 활성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책을 제작할 수 있는 환경 때문이다. 일례로 해외의 전자책 서비스 사이트 스매쉬워드(www.smashwords.com)에는 약 3만5000권의 자가 출판물이 등록되어 있다.

이외수와 함께 하는 올레e북 공모전
국내에도 텍스토어(www.textore.com), 북씨(www.bucci.co.kr) 등 저자 스스로 책을 만들어 팔 수 있는 사이트가 생겼다. 텍스트 파일을 전자책으로 변환하는 프로그램과 유통망을 제공하고, 전자책 판매 수익의 일부를 가져가는 방식이다.

KT의 전자책 서비스인 '올레ebook'도 자가 출판이 가능한 오픈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4월부터는 저자를 발굴하기 위한 공모전을 진행 중이다. 이외수 작가가 제시한 '산갈치'라는 모티프로 쓴 소설을 모집해 당선작을 전자책으로 판매하는 내용이다.

이런 출판 방식은 폐쇄적이고 자기완결적이었던 종이책의 출판 방식과 매우 다르다. 작가의 꿈은 골방에서의 고뇌가 아닌 이외수 작가의 단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당선작은 공저로 출간된다. 본선에 진출한 8편의 소설은 토너먼트 방식으로 승부를 겨루는데, 심사에 네티즌의 투표가 반영된다. 집필 과정에 독자의 반응이 직접 개입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상호작용적 책 쓰기다.

우리는 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둘러싼 활기찬 움직임, 누군가는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 변화들은 어쩌면 훗날 헛소동에 그칠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지금 우리에게 책, 그리고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오랫동안 익숙하고 당연했던 이 종이 매체와 사회적 관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 왔던 것일까?

명승은 대표는 세미나 마지막에 덧붙였다. "그런데 우린 책, 또는 콘텐츠를 읽는 걸까요, 듣는 걸까요, 훑어보는 걸까요, 구경하는 걸까요, 이용하는 걸까요?" 책의 미래는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지혜를 향한 기술에 있다.

"바야흐로 책의 기술적 혁명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그런데 한 권의 책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자신의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축적해 온 지식과 몽상을 담고 있는 책들이란 과연 어떠한가?

그것들을 통해 이뤄져 온 정신의 편력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 산물의 화려한 거품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만, 즉 주위에 문화적 합의들이 수립되는 걸작들에만 시선을 두려 하는 우리는, 그것들의 본질적인 기능, 즉 무언가를 망각과 소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존하는 그 단순한 기능에 과연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는 이 넘쳐 나는 글들의 역설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그 끔찍스런 빈곤함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초라한 이미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책이란 반드시 진보의 상징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책은 정확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책의 우주>의 대담을 주선한 저널리스트 장필리프 드 토닉은 이런 질문으로 책을 맺는다. 여기에 대답할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